[작업실 불빛] 열 두 대문 바삐 여닫히도록 04
[작업실 불빛] 열 두 대문 바삐 여닫히도록 04
  • 권용화 <볕드는 창>
  • 승인 2025.02.0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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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처럼 미처 서울에 진입하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농업이 아닌 다른 업으로 생계를 바꾼 사람들은 많았다. 외가 쪽 첫째, 둘쨰 외삼촌은 그래도 농부로 남았지만, 셋째 외삼촌 댁은 어느 하룻밤의 불행 때문에 그렇게 된 경우였다.

“논에서 벼를, 딱 하루만 더 말려서 탈곡을 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 밤에 비가 억수같이 와서 모두 떠내려가고 논은 몹쓸 꼴이 되고 말았다. 내년 농사를 위한 씨나락은 커녕, 추석 차례에 올릴 햇곡은 커녕, 당장 네 아이와 아침을 해 먹을 쌀이 없었다.

손 안에 쥔 것이 하나도 없었건만, 외삼촌은 빨리 결단을 내렸다. 서울의 변두리에서 어떤 일감이든 배워보기로. 외삼촌은 후에 안양 시장통에서 족발 장사를 하게 되는데 외삼촌의 열의에 한 족발집 사장님이 마음을 내어 자신의 비법을 전수해 주게 된다.

어머니는 항상 그러한 오빠들의 ‘잡초같은 생명력’이랄지 ‘깡’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는 어머니 기준으로는 ‘주변머리’가 부족했다. 아버지는 누군가의 밑에서 기술을 배우는 것을 어려워하셨고, 그래서 딱히 날품팔이 밖에는 당장 구해지는 직업이 없었다. 어머니는 근심이 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를 끼고 마을 한쪽에 앉아 있는데 웬 할머니가 어머니를 지그시 보시더니 말씀하더란다.

“아주머니는 아프네요…,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이 아프네요…. 아주머니는 서른이 넘어서 결혼했어야 했는데…, 다른 인생을 살고 있네요…. 그래도 어떡해요, 자식이 둘이나 있으니..., 그냥 살아야죠.”

어머니는 화가 발끈 나셨다.

“그런 말씀 말고 제가 이 형편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되는지 방도를 좀 말씀해주세요!”

“좋아요. 열 두 대문 바쁘게 여닫히도록 장사를 해보세요. 이 집으로 갔다 저 집으로 갔다, 열 두 대문 바삐 여닫히게 장사를 해보세요. 그러면 몸도 안 아프고 돈도 벌릴 거예요.”

며칠 후, 어머니는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일거리를 찾아 1시간 걸리는 곳까지 가서 웬 밭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머니가 본 사람은 어느 눈 먼 할머니와 딸, 손녀 3대였다. 그들은 시금치를 잔뜩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할머니는 등에 손녀를 업고 이 시금치를 자신이 어떻게 키웠는지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딸은 손님맞이와 계산을 맡고 있었는데 그 눈 먼 할머니의 얼굴이 어떻게나 밝고, 해사하고, 투명하게 맑던지 어머니는 빛을 마주하는 느낌이셨다.

‘아…, 저렇게 눈이 머셨는데도 저 분의 얼굴이 환한 보름달 같구나. 나는 무엔가, 눈도 잘 보이고 다리도 멀쩡한 내 몸이 있다.’

시금치 ⓒ권용화

그때, 어머니에게 전광석화 같은 생각이 하나 스쳤다.

‘내일이 소풍인데, 이 시금치를 사서 팔아보자!’

어머니의 판단은 옳았다. 수중에 있는 돈을 있는 만큼 탈탈 다 털어 눈 먼 할머니의 시금치를 사서 마을로 돌아왔다. 소풍날이 닥친 집집마다 김밥을 안 마는 댁이 없었다. 시금치는 한나절 만에 몽땅 팔렸다.

어머니에게 쌈짓돈 종자돈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에게 처음 말을 붙인 그 할머님은, 어쩌면 당골네였을까.ⓒ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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