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마을 작은 학교인 구름산자연학교는 해마다 김장을 한다. 흔히 하듯 절인 배추를 사서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무 배추를 심고 가꾸어서 김장을 한다. 봄 농사로 지었던 감자를 캐고 그 밭을 다시 일구어 무 배추 농사를 짓고 겨울 들머리에 김치를 담근다. 밭을 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김치를 담는 일까지 아이들의 손길과 더불어 부모들과 교사들이 다 함께 치르는 큰 잔치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만약 결혼식을 한다면 그 예식장은 우리학교 텃밭에서 하기로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온 밭 가득 하얀 냉이꽃 뒤덮여 있는 따사로운 봄날에 찔레나무 새순 돋는 뒷산이 배경이어도 좋고, 개망초꽃 아이들 키만큼 자라난 언덕배기 밭에 그 초록초록한 싱그러운 여름날이어도 좋겠다. 사그락사그락 뒷동산 북쪽 경사면에서 불어오는 침엽수 낙엽들 그 바람 같은 가을날이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겨울날 송이송이 눈꽃송이들의 축복을 받아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겠다. 주례사에 축가에 하객들의 식사며 주차 관리까지 알뜰하게 갖춰진 완벽한 예식장이 아닐 수 없다.
그 150여 평 텃밭은 그만큼 나에게, 아니 우리 구름산자연학교 식구에게 가장 먼저 계절이 지나는 것을 알려주고 그 계절마다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곳이다.
한여름 끝, 감자를 캐고 나면 밭은 한바탕 북적인다. 어른들은 무성하게 자라난 풀을 베고 퇴비를 뿌려 흙을 뒤집고 새 고랑을 낸다. 아이들은 메뚜기를 쫓아다니거나, 지렁이랑 노느라 땅 속을 파고 논다. 때로는 맹꽁이나 장지도마뱀을 발견하곤 벅찬 놀라움에 소리치기도 한다. 삽질 한 번 해보지 않았던, 호미질 한 번 해본 적 없었던 어른들이 흠뻑 땀을 흘리고 막걸리 뒤풀이도 빠지지 않는다.
스무 해 동안 밭갈이를 했으니 무수히 많은 땀방울이 흙에 맺혔으리라. 그 뿌듯한 땅에 올해도 무와 배추를 심었다. 아기 모종이 빼꼼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면 그 때부터 아이들은 틈만 나면 텃밭에 올라 배추밭 고랑마다 무밭 고랑마다 걸어 다녔다. 벼가 농부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우리 밭 무와 배추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아이들의 손과 발이 모이면, 배추흰나비 애벌레는 애초에 배추 곁에는 오지도 못한다. 어느새 마구 늘어난 달팽이가 배추를 갉아먹기 시작하지만, 그 역시도 아이들 등쌀에 오래가지 못한다. 몇 포기 배추를 진딧물에 나누어주면, 해마다 무와 배추농사는 풍년이다. 포기 크기는 좀 아담하지만 노랗게 차오른 속잎을 먹어보니 그 맛이야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뽑고 나른 배추를 어른들이 절이고 씻는다. 다음 날 물을 뺀 배추에 양념을 하는 일도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한다. 평소에 김치를 잘 안 먹던 녀석들도 양념 묻힌 속잎 하나를 떼어서 입에 넣어주면 쫍쫍 맛있게 먹고는 또 달라고 성화다. 스무 해 동안 김장을 해왔지만 해마다 새롭다. 어느 해는 소금을 너무 많이 치기도 하고, 어느 해는 양념이 부족해 이미 양념한 배추에서 양념을 걷어내기도 한다. 해마다 새롭게 담지만 그 김치 맛은 솔직히 참참참 맛있다.
올해도 또 맛있는 김치가 되었다. 김장 김치를 슥슥 잘게 찢어 아이들 밥상 위에 올려주었다. 밥 한 숟갈 뚝 뜨는데 4살 아이가 갑자기 밥 먹다 말고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인다.
"별똥, 이 김치 내 발자국 소리 듣고 자란 배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