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이야기 하나
“자, 너희들, 이제부터 위인전을 고르는데, 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모진 고문을 받고 일찍 죽고 뛰어들고 뭐 그런 불쌍한 사람들 고르지 마. 자기의 목표가 있고 그걸 위해 정진해서 성취한 사람. 성공한 사람들. 재주가 뭔가 있었던 사람들. 특별난 게 그 사람한테 있었어도 괜찮아. 그런 사람들 거 골라.”
하안사거리 ○○문고. 한 어머니의 가르침이 쩌렁쩌렁하다. 아이가 둘이다. 시무룩하다. 고르고 싶은 책을 제한 당했기 때문인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인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어린이들이, 불쌍하다.
대한민국, 기념일이 많아 불쌍한 나라
“아니, 우리나라 문화기획은 왜 만날 무슨 날의 몇 주년 기념, 몇 번째 기념, 뭐 그래? 그 날 기념 안 하면 큰 일 나나?”
‘숱하게 기념해도 법대로 안 되니까 계속 기념하죠!’
외치지 못한 나는 쫄보였다. 26세의 나. 20년 전에도 입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거슬렸다 짤리면 안되니까. 집에 면피라도 세우려면 계속 다녀야 하니까. ‘입 속의 검은 잎’.
급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광명. 3.1 운동 103주년의 해라고 해서 특별했을까. 특별했다.
올해 3월 27일은 광명시가 공식적으로 선포한 제1회 광명시 독립유공자의 날이었다. 1919년, 광명에도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을까. 있었다.
들불처럼 번진 만세 운동
더 이상 어떻게 평화롭게 치욕당하나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 민족대표 33인은 명월관지점에서 체포당한다. 민족대표와 학생대표들은 원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할 예정이었다. 남은 것은 민초들이었다.
아무런 통지를 받지 못한 채 모여 있던 수천 명의 학생과 민초들은 오후 2시 반,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시작한다.
4월초까지 전국에서 2백여만 명
진정으로 나라 위한 이는 민초들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인쇄소에서 27일까지 2만 1천 장 또는 3만 5천 장 가량 인쇄되어, 운반책들이 전국으로 날랐다. 보성사 사원과, 휴교령 내려진 학교와 일제가 뒤지는 하숙집을 떠나 고향으로 이동한 학생들 등이 그들이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 말까지 전국 2백여만 명의 민초들이 참여했다.
광명 A 독립유공자 댁의 경우 “200여명의 일원이었을 뿐, 항일 역사 속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해” “여기는 유럽 아니잖아요. 대한민국이지” 시청이 원하는 건 인구세금・도시화・존치금 vs 역사・문화・미래도시 광명 |
A유공자 댁 철거 당연, 고택의 원형이 손실되어 존치의 가치・의미 낮아 [문화재보호법 제5장 제53조]에 의거, 대상문화유산이…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나지 않은 것이라도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것…항일독립운동과 해방 후 민주화 및 산업화 등의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을 것…다만 위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경우에도…보수・복원・정비 등으로 본래의 문화재적 가치가 크게 떨어진 경우,…그밖에 문화재적 가치가 있더라도 문화재 등록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이 어려운 경우 등에는 등록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강민제, “등록문화재 제도와 사유재산 조화에 관한 고찰”(요약), 2019, 42~43p |
문화재보호법 (2022. 7. 19. 현재) 제4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책무) ①국가는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및 활용을 위한 종합적인 시책을 수립ㆍ추진하여야 한다. ②지방자치단체는 국가의 시책과 지역적 특색을 고려하여 문화재의 보존ㆍ관리 및 활용을 위한 시책을 수립ㆍ추진하여야 한다. ③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각종 개발사업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경우 문화재나 문화재의 보호물ㆍ보호구역 및 역사문화환경이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④국민은 문화재의 보존ㆍ관리를 위하여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여야 한다. 법제처 |
1919년 3월 말, 소하리와 가리대리
3월 27일. 노온사 경찰관 주재소 근방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이튿날 28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소하리의 한 젊은 농민이 집으로 순사 두 명이 들이닥쳐 연행되었다. “이정석. 치안법위반죄”.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56)은 아들 또래의 최호천(21)에게 말을 꺼냈다. 28일 밤. 이종원과 마을 주민 김인한(일명 김거봉), 최정성, 류지호, 최주환 등이 50여명을 이뤄 면사무소 부근에서 만세를 부르고 출발한다. 윤의병(20) 역시 이야기를 듣고 뜻에 동참, 내대촌에 모여 있던 20여명과 합류하여 무리를 이끌었다.
“발포할지 모르니 돌이나 곤봉을 휴대하라”
점점 더 합세하여 100여명이 되어 노온사 주재소(지금의 온신 초등학교)로 가는 길. 20~30여분 후에 그들은 내가리대리에 당도했다. “이 인원으로는 부족하다” 도움을 요청하여 다시 그 곳 주민 100여명을 모았다. 처음 인원이 200여명이 되었다. 무리를 나눠 순사의 집이나 숙식하는 주막을 뒤져 이정석을 찾았으나 없었다. 결국 일부는 계속 찾고, 큰 무리는 주재소를 에워싸 모였다.
일본 순사 아카마츠(赤松)의 보고를 인용하면, 주재소 앞 선인(鮮人)들은 “폭언, 폭행”을 하였다.
<아카마츠(赤松) 순사 보고서 요약> “대정 8년 3월 28일 오후 11시 15분경”, “약200명의 선인*이”, “곤봉과 작은 돌을 가지고 함성을 울리며, 침실 뒷벽에 약 1치 평방**의 구멍을 뚫고, 침실 싸리문에 1~2번 작은 돌을 던졌으며, 게시판과 뒷벽을 파괴하는 등 폭행”을 하였고, “불태워버린다. 순사•순사보를 쳐 죽인다”, “오늘 저녁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내일 밤 다시 습격하기 위하여 몰려 와서 불태워버리고 쳐 죽이는 행동을 하여도 괜찮겠는가.” *선인 : 일제가 조선인을 낮추어 칭하고 서류에 올리던 말 |
“이정석을 내놓아라,”
순사들은 등불을 끄고 없는 체하다가 “이정석은 이미 본서로 송부되었다”, “명일(내일) (석방을)조처하겠으니 해산하라”, “관리인데 약속을 어기겠는가”하고 대답했다. 이에 사람들은 노온사 주재소 안과 앞, 주재소 뒤편에서,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었다. 다음 달로 계속
일제는 온땅에 쇠말뚝을 남겼고, 관리들은 표지판을 남겼다.
광복로·광복교를 아십니까 *원호처 : 지금의 국가보훈처 “가게 연 지 10년 넘었구요. 요 앞이 광복시장이라 가게 이름에 광복을 넣었어요.” ‘기억과 공감’ 없는 나라, 영원한 일제치하와 같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 목동으로 간다 일제시대 항일 유산, 6.25 때 다 파괴되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