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추억3
그 아이를 만나러 갔다.
예전에 그 아이는 항상 먼저 나와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건 내가 지각을 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가 항상 이른 시간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 아이의 첫 인상은..글쎄...혼자서 세월을 비껴간 건지 변한 것도 없이 여전한 모습이었다. 아니, 조금은 몸무게가 늘어 보이기도 했고, 주름이 깊어진듯도 했지만 그건 아주 억지로 변화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마음에나 보이는 사소한 변화였다.
그 아이도 날 보더니
"예전보다 통통해졌구나. 훨씬 좋아 보인다." 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조금씩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만나기 전의 설레던 마음도 사라지고 얼마 전에 봤던 사람처럼 담담한 마음이 들었다. 이젠 가슴이 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떤 실망감을 느끼지도 않는 상태.
아마 서로가 그랬으리라...
우리는 이런 저런 옛 얘기와 친구들의 소식들을 나누고 밤 늦도록 2차, 3차 옮겨 다니며 헤어지기를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젠 자주 연락하고 술친구도 하자며 서로의 손을 잡고 서서
서로를 바라보다 아쉽게 헤어졌다.
나는 악수를 하고 돌아서면서 우리 둘이 왜 이제와서 사랑하지도 않고, 애타게 그리워하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만나고, 반가워 하고, 돌아서며 아쉬워 다시 만나자고, 좋은 술친구가 되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물론 그랬다....
우리 둘은 여태 독신이었고, 둘 다 조금은 외로운 작업을 해야하는 직업이었으며, 서로를 잘 아는만큼 잘 통할 가능성이 많아서 술 친구로는 아주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서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실리적인 것과 다른 어떤 묘한 감정..어떤 부채감이랄까...그런 감정이 가슴을 코옥콕 찔렀다.
그런데 난 왜 이 아이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거지?
그런 의문의 답을 찾다보니 실타래처럼 여러가지 감정이 엉켜서 날 혼란스럽게 했지만 그래도 그 날,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이런 거였다.
<우리 둘은 한 때 가까운 사이였지만 그 후 또 한때 소원했던 사이이고, 그것이 과거 누구의 잘못이었건 이제 와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만을 간직하게 된 세월이 되어버렸나보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소원했던 세월에 대한 마음의 부채를 서로에게 갚고 싶었던 거라고>
(물론 자주 만나 서로에게 잘 해 준다고 그 부채감이 사라질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렇게 정리하면서도 뭔가 게운치도 않았고, 웬지 쓸쓸한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원더풀 라이프>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막 죽은 사람들이 림보(저승과 이승의 중간지대)역에 내려 일주일이란 시간 안에, 면접관들과 상담을 하고 고민을 한 끝에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골라내고, 그것을 영화로 만들어 그 기억만을 가지고 저승으로 떠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러다가 나는 죽을 때 어떤 기억을 가지고 가고 싶을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내가 요즘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이 안나나? 결국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하고 포기하고는, 아직은 선택하고 싶은 순간이 없다고 결론 지었다. 하지만 그런 결론의 결과는 혹독했다. 내 무미건조하고 그래서 불행하기까지 해 보이는 이성과잉의 청춘.난 도대체 그 동안 뭘 했단 말인가..!
또 다시 쓸쓸해졌다.
그런데 며칠 후, 어느 개인 병원에서 순번을 기다리는 사이, 무미건조 불행한 청춘의 한 모퉁이에 숨어있던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다.
사실 그날, 기다리는 사람은 많고 시간은 아깝고,,그러다 만화 잡지가 보이길래 직업적 관심이랄까, 요즘 아이들은 어떤 만화를 보나 궁금해져 무심히 만화잡지를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녀취향의 이쁜 그림이 있는 어떤 만화를 보게 되었는데, 첫 키스를 하고 당황하는 대목이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다음 장을 넘기다 순간 망각의 강을 건넜던 어떤 추억이 돌아왔던 것이다!
나의 첫 입맞춤....
대학교 2학년 때였던가..3학년때였던가...?
예의 그 아이가 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를 타야했고, 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부산역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그 아이도 그랬는지 대구까지 가는 표를 끊어서 대구까지라도 같이 타고 가자는 것이었다. 그 아이 소원이라니...나는 못 이긴 척 끄덕이며 기차에 올랐고, 잠시 후 우리는 덜컹거리는 객차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그런데 서로 별 할 말도 없고 어색한 분위기만 흘렀고, 점점 대구는 가까와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침묵을 깨고 객차 사이의 연결 통로 쪽으로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제안했다. 난 그러자고 따라 나갔고 우리 둘은 사람없는 통로에서 덜컹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아이가 나에게 뭔가를 물었고, 나는 덜컹거리는 소음때문에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뭐라구?" 하며 그 애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귀를 쫑긋 세웠다. 그 아이는 다시 뭐라고 큰 소리로 말했는데 나는 그래도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다시 "뭐라고?" 하며 그 아이 쪽으로 더 가까이 귀를 대는데, 그 순간 기차가 터널로 들어갔고 터널은 그 아이의 소리를 삼키고 통로의 빛마저 삼켜버렸다.
깜깜한 공간에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로만 가득 채워진 그 순간,
내 볼에 그 아이의 입술이 닿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가슴이 뛰었고, 적어도 그 순간만은 덜컹거리는 기차소리보다 내 가슴 속의 고동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 입맞춤이 그 아이의 고의적인 입맞춤이었는지 아니면 기차가 흔들려서 우연히 그 아이의 입술이 내 볼에 닿았는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잠시 후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어색해 그 아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객차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그 아이에게 그것이 고의였는지 실수였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그 입맞춤은 오래도록 가슴을 뛰게한 추억이 되었다. 그랬다. 나는 그런 추억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추억을 잊어버리고 살았었지? 어쨌거나 나는 우연히 만화를 통해 내 추억을 찾아냈고, 내게도 그런 풋풋하고 가슴 설레던 첫 입맞춤의 순간이 있었다는 걸 드디어, 드디어! 기억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알게 되었다. 그 아이를 만났을 때의 부채감의 정체를.
그 아이는 내 메마른 청춘에 그런 고운 추억들을 선물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난 그 아이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그 아이를 만나면 얼마 전 봤던 <원더풀 라이프>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니가 있어서 난 행복했었다고....>
그리고 어쩌면 나도 살다가 세상 누군가에게 그런 얘길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니가 있어 행복했다고...넌 내 행복의 일부분이었다고....>
내가 죽어 림보역에 머물다 떠날 때,
나는 누구와의 추억을 가지고 떠날 지...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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