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추억1
*이 글은 예전에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3편짜리인데...
어느 분의 요청으로 그 1편을 올리겠습니다.
얼마 전 작가실로 백송이의 장미가 배달됐다. 물론 그 장미는 나한테 온 것이 아니라, 나보다 한 살 어린 귀여운 노처녀 작가 박 모양에게 온 것인데, 사실 작가실에 택배로 책 배달이 오거나, 우리가 항상 마시는 생수 배달 등등..배달 자체가 뭐 새삼스레 관심을 끌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장미, 그것도 "백송이의 장미"라 함은 뭔가 로맨틱한 사건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면서 -작가들이다보니 아마 모르긴해도 몇 초 사이에 수많은 가능성을 놓고 드라마 썼겠지?- 누가 배달한건지 추궁을 받았고, 박 모양이 어색해하며 별 사람 아니라고 하자 다들 더 수상스런 눈길을 보냈다.
물론 모두가 애인한테서 온 거라는 상식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몇몇 질투 어린 시선은 "그거 자작극 아냐?" 하며 박 모양의 다음 카드 청구서에 00꽃집이라고 써 있는 지 조사해봐야한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 박 모양과 좀 친하다는 "빽" 하나로 결국 난 장미 백송이를 보낸 사람의 카드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엔 정말 별 다른 연정의 글은 없었다. 그저 아끼는 팬으로부터...란 간단한 글 뿐.
알고보니 오랜 친구인데 박 모양의 생일이 다가오자 그런 아이디어를 내서 보내준 것이라는데, 물론 그 친구가 남자이니 더 깊은 내막(?)이 있을수도 있단 생각이 전혀 안 든 것은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래서 박 모양은 분무기로 제 머리 손질하듯 물을 뿌려가며 애지중지 안고 있다 집으로 가져갔고, 우리는 한 동안 저 나이에도 장미 백송이를 받아 보고 좋겠다고 부러워 했다.
아니,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나이되도록 백송이 장미 못 받아 본 사람으로서 심정 상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난 장미 한 송이는 받아 봤지만 두송이 이상은 받아 본 기억이 없는 것이다.
"졸업식할 때나 시상식 때 받은 꽃다발이 고작이었구만...어휴
한심한 것...!"
그렇게 푸념하면서, 그래도 위로랍시고 혼자 그렇게 생각도 해봤다.
"그래, 내가 박 모양처럼 요즘 같은 계절에 태어났으면 장미 많
이 받았을거야. 내가 장미가 비싼 겨울에 태어났으니 어쩌겠어?"
하지만 별 위로가 안 됐다. -누군들 됐을까?흑흑..-
그러다 불현듯 내 생일의 장미와 연관된 내 옛 사랑의 추억이 떠올랐다.그때가 언제였더라...대학교 1학년 쯤 됐었나...하여튼 그 애는 나랑 동갑내기였으니 똑같은 대학생이었고, 그러니 당연히 돈없는 가난한 고학생 분위기의 두 사람이었다.
거기다 학교가 서울과 지방으로 떨어져 있어서 자주 보지도 못했고, 또 사귄다고 하기엔 아직은 미숙한, 그냥 초등학교 친구 정도의 사이였는데, 어느 겨울 저녁, 갑자기 이 친구가 전화를 했다.
집 근처인데 좀 만나자고.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동네에 변변한 까페같은 게 잘 없던 시절이라 어디서 봐야할 지도 난감했다.그래서
뭐라고 해야할 지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그 친구가 대뜸,
"전화 박스 뒤로 양지다방이라고 있네? 여기 찾아 올 수 있지?
이리 나와. 기다릴께."
하며 끊어버렸고, 나는 어색하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알았다고 하고는 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동네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미스리한테 윙크 한 번 하고 허벅지 한 번 힐끔 보려고 찾아가는 동네 다방의 분위기가 대학생 청춘 남녀가 만나기에 그리 어울리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약속을 했으니...나는 일단 양지 다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그 애를 찾으려고 쭈욱 훑어 보니 구석에는 50대 아저씨와 콧소리 내며 웃고 있는 미스 리가 있었고, 또 다른 한 쪽에는 30대 남녀가 나란히 돌아 앉아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 애가 날 보고 있었다. 나는 조금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애에게 가서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앉았다.무슨 일이냐며.
"뭐..그냥..왔어."
그 애는 그렇게 어색하게 말하고 이런 저런 학교 얘기와 그 당시 대학생의 안주거리였던 정치꾼에 대한 얘기와, 하여튼 도대체가 무드 없는 얘기만 실컷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저 여자... 장미 백송이 ...받았나봐...저런 거 좋아하냐..?"
뜬금없는 그 얘기에 우리 너머를 보니 정말 그 30대 여자가 장미 백송이를 받아 안고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야, 근데 왜 남자들은 여자한테 장미꽃을 주냐? 그러면
낭만적으로 보이나? 난 저런 거 받고 싶단 생각 안 들더라"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때려주고 싶지만, 어쨌든 난 그때 그런 말을 했다.그리고 잠시 후, 그 애는 가야한다고 했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데?"
"선물.."
"선물? 나한테? 왜?"
"곧 니 생일이잖아... 생일엔 내가 내려 올 수가 없어서..."
".......!"
"돈이 없어서 비싼 건 못 샀어...담에 돈 많이 벌면 비싼 거
사줄께."
그 애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침묵했다.
난 그 선물을 풀어보며 내 생일을 기억하는 그 애때문에 당황했고,
나름대로는 이쁘고 고운 핀을 고르느라 참 많이 돌아다녔겠구나 감동했고, 이 애가 그 동안 날 많이 좋아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며 가슴이 아려왔다.
하지만 난 그렇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어색한 얼굴로 고마워-,정도의 간단한 인사 밖에 못했을거다.잘은 기억 나지 않지만.그리고 그 앤 곧 기차 타야된다며 일어섰고, 나도 일어섰다. 하지만 얘기는 이것이 다가 아니다.
잠시 후, 양지다방을 나온 우리 둘은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할 상황이었는데, 그 애가 뭔가 머뭇거리는 얼굴로 날 불렀다.
내가 돌아보자 그 애는 털스웨터를 올리고는 제 가슴 부근에서 뭔가를 쓱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난 놀라서 그걸 보니, 그건 다름 아닌
장미 한송이였다.
"아까부터 주고 싶었는데...우리 뒤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백송이나 받아서 말야...너한테 이거 한 송이 줄려니까
미안하더라구... 한송이 밖에 못 사서 미안하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달려가버린 그 애.
난 그 자리에서 그 애의 가슴 속 온기가 느껴지는 따뜻한 장미 한송이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멀리 사라지는 그 애의 모습이 자꾸만 내 마음 속에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흐르고 가끔 그 아이를 생각하면 그때의 소박한 한송이 장미가 날 미소짓게 한다.그리고 새삼 생각해본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여자에게 장미꽃을 선물하는 걸까? 그건 어쩌면 -비록 알고 주는 건 아닐지라도- 본능적으로 사랑이란 게 그 장미꽃과 같다는 걸 알아서가 아닐까?
장미처럼 향기롭고,
장미처럼 아름답고,
장미처럼 가시도 있긴 하지만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꽃도 시들듯이,
우리의 사랑도 피었다 지겠지...하지만
사랑이란 게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은...
널 사랑하고, 날 사랑하고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거라고...
갑자기 어릴 적, 장미 한 송이를 들고 내 마음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던 그 아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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