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왜 작가하니?
나에게 "너 왜 작가하니?"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대체로는"뭐 썼어요?" , "지금 뭐 쓰시는데요?" , "작가하려면 어떻게 해야되죠?" , 아니면 "나 좋은 소재 있는데...내 얘길 드라마로 하면 끝내줄 거예요. 어때요? 들어 볼래요?" 이런 식이죠.
사실 "너 왜 작가하니?"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건 나 스스로지요.
일을 하다 힘겨울 때, 사람때문이건 일 자체 때문이건 갈등이 생길 때,
수시로 내 글이 부끄러울때....
그때마다 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너 정말 왜 작가하니?"
물론 명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마치 " 너 왜 사니?" 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질문일지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 함께 작가의 길을 출발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제 친구에게서 다시 글을 써볼까한다는 편지와 함께
내가 언젠가 철없이 열정만 있던 시절, 그 친구에게 보냈던 '작가초년생'다운 제 글을 그 친구가 재미삼아 함께 보내왔더군요.
예전 내 글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내용을 천천히 읽었지요.
1995.10.23. 쌀쌀한 가을날씨.
작가가 언제나 생각해야 할 몇 가지.
1.시선,모든 감지되는 것들에서 삶을 읽어라.
2.어떤 작은 장면에서도 충분히,적절히,풍부하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라.
3.주제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는 형식과 구성인가?
4.내 생각과 글이 부끄럽진 않은가?
5.아름다운가?
이 다섯가지가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은 글쓰기를 하는 동안은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며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한다.
그렇지 않은 작가는
단지 겸손하지 않거나 게으른 작가가 아니라
이미,
전위에 설 수 있는 품성을 잃어버린,치명적인 쓰레기 제조기다.
00야, 이거 유치하긴 하지만내 방 벽에 붙여 놓고 사는데
문득 문득 읽을 때마다 내가 치명적인 쓰레기제조기 아닌가?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오늘도 거리를 걸으며 되뇌이고 반성을 했어.
나도 재미없는 드라마 싫어.
그리고,
베끼는,스스로 제 바닥을 보이는 드라마도 한심해.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경계해야할 드라마는,
작가정신이 없는 드라마지.
그래서,다른 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극악하게,
혹은 혼성모방으로
짜가 드라마를 생산해 놓고는,
"너희도 온갖 서러움을 겪어봐라 나처럼 안되나?"
한다던가,그런 주변에서 그런 이들이 남긴 흔적들을 부럽게 혹은 동정적으로 보며,난 이해해.오죽하면 그러고 살겠냐? 창작이 쉬운 게 아니잖아? 시청율이 얼마나 피말리는건데.. 하며 너그러운 척하다가,언젠가 자신에게 그런 유혹의 날이 왔을 때를 미리 대비하는,그런 꼴을 보게 되더라도 단지 새로운 것이 아닌,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작가.그리고 새로움을 소리 높여 떠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묵묵히 실행하는 작가>가 되어야 할텐데...
그런고민을 해.
하지만 그런 작가가 되는 길은만만치 않을테고..
그리고 이럴 때의마음가짐은,
내가 잘나서 할 수 있을 거야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야할, 해야만 할 길이기에 나라도 시작한다고.
왜냐하면,그 길 위에서 어느날 시련과 시행착오를 만나 혹 좌절하거나
한계를 느낄 때
만약 내가 잘나서 가는 길이라 여겼다면 제 한계 앞에서 절망하고
더는 그 길을 갈 용기도 당위성도 찾지 못할테니까.
얼마전 읽었던 전 모PD(?) 의 인터뷰 기사에 이런 글이 있더라.
<드라마가 무슨 사회의식을 선도하거나 전수하는 것도 아니고,그렇다고완벽한 예술작품도 아닌데 말만 무성한 게 짜증났다>
한편,이해안되는건 아니지만좀 다른 생각을 했어.
드라마작가라고해서(감독도 당연히 포함해서)
대중기호상품의 생산자로서, 기본적인 도덕적 선을 넘지 않으며 구미에 맞게 팔기만 하면된다고 여긴다면 이는 자칫 시청자에 대해,또 작가정신에 대해 기만적인 생각이 아닐까 걱정이 되는거지.
이걸 극단적으로 보면,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바보상자 시간 메우는 데 복무하는 일’로 여기는 거와 뭐가 다를까?
그리고 우리가 흔히 도덕적이니 어쩌니 하지만 그 도덕의 잣대가 뭘까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더라.사소하게 이런 장면은 좀 과했지,이건 좀..하며 몇몇 장면에 대해 수위 조절을 하는 문제에서 상식적 도덕의 기준을 맞춰주기만 하면 되는 게 작가로서 도덕적 임무를 완수한걸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할 때,가끔 다음 구절을 떠올려 봐.
“해야할 일은 해야한다.
어떠한 고난과 장애와 위험이,그리고 압력이 있더라도.
그것이야말로 모든 인간 도덕의 기본인 것이다.”
뱀꼬리:00야, 근데 있지...이렇게 떠들며 너한테 편지를 쓰면서 문득 든
생각인데...어느 날 내가 내 글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명하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으면 그때,
너 나 몰래 납치해서 반 죽도록 패주라.
그래서 내가 너한테 "야, 왜 때려!"
하면 , "니가 그 때가 오면 이렇게 해달라고 했잖아!"
하고 말해. 그러면 "어...그랬지...지금이 그때구나..."
하며 내가 반성하지 않을까?
친구가 보내 준 내 글은 여기까지 였죠.
그때나 지금이나 하찮은 글 나부랭이를 쓰건 대작을 쓰고 있건
참 작가란 인간은 항상 글에 대해,인간본성에 대해 열등감을
안고 그 열등감과 싸우고 때로 이기며 살아가는 족속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문득...
오늘밤이 바로...
어둠 속에서 내 친구가 나타나 날 납치해가서 두들겨 패줄,
바로 '그 때'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머리칼이 쭈뼛 서며
'내가 왜 작가하지?' 하며 방어적으로 중얼거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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