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4일. 어 한글이 되네!
어, 한글이 되네.
여기 유엔 컴퓨터 가운데 몇 대는 한글이 되는데
오늘은 운 좋게 되는 거에 앉았어요.
어제 그제 오랜만에 밤마다 컴퓨터에 앉아
그간 일들을 써 보았어요.
아참, 운영자들. 지난 번에 보낸 거, 가출을 끝내고 돌아가면서 쓴 거. 그거는 까페에 없네. 운영자들에게 쓴 거기는 하지만 거기에 대충 그 기간의 소식을 담고 있어서, 다른 이들에게 편지 쓸 때는 바끼통에 보낸 글 까페에서 보라 했거든요. 비슷한 얘기 따로 쓰기 그러니까.
그 때 것도 까페에 같이 올려 주세요.
한국도 많이 덥지요?
여기요? 으아아아 입니다.
아참, 누구 운영자 가운데 하나.
까페에 있는 거 반전평화 기사 모음 있잖아요.
그거 여기에서 하나 하나 클릭해서 보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거 한글 파일 하나에 묶어서 좀 보내줄래요.
그 방에 있는 기사 못 들여다본지 꽤 되긴 했는데
나름대로 이곳 사정을 이해하는 거 선별해서 보내주면 좋겠어요.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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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끼통
1 김치찌개
오늘 점심에는 김치찌개를 먹었어요. 이번에 와서는 처음 먹는 김치찌개. 요즈음 우리 숙소에는 다섯 사람이 있거든요. 동화랑 혜란이, 하운이, 승로, 그리고 나. 다른 팀원들은 모두 바스라에 가 있어요. 원래는 이라크 전역을 투어할 계획이었는데 이런 저런 의논 뒤에 바스라에만 나흘 동안 다녀오기로 하고 떠났어요.
아무래도 편하기로는 여럿이 지내는 것보다 그 수가 적은 게 더 낫잖아요. 게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면서 다들 얼마만큼씩은 지쳐 있기도 했으니 말이에요. 에이 몰라. 아무튼 좋아요, 서로 마음도 잘 맞고요.
보통 동화와 승로, 그리고 나는 따로 가보아야 할 곳이 있지 않으면 알마시뗄 헬스센터에 나갑니다. 지난 번 개관을 했지만 여러 모로 모자란 구석이 많아서 다시 공사를 하고 있어요. 게다가 지붕을 받치던 철봉이 넘어지면서 아이들이 다치는 일까지 있었거든요. 연못으로 만든 곳에는 아이들이 들어가 놀다가 발을 다쳤어요. 그대로 둘 수는 없었지요. 다 한 거라고 되어 있는 걸 보면서도 성에 차지 않는 마음이었는데 예상하던 일이 그대로 일어난 거였어요. 잘못이었어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보았으니 말이에요. 해서 지금은 철봉 하나 세워 놓고 천막을 얹은 지붕도 튼튼한 지붕 구조물로 바꾸었고, 연못이라고 만든 자리에는 흙을 덮어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었어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물 공급이 거의 안 되다 시피(결국 일주일 가까이 물을 틀어도 바닥이나 적신 정도, 물차를 불러다 물을 채웠음)한데다가 배수조차 전혀 되지 않으니 말이지요. 물이 더러워지면 바가지로 그 물을 다 퍼다 비워야 해요. 결국 흙탕물로 더러워진 그곳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바닥에 있는 뾰족한 무엇에 베이고 만 것입니다. 도무지 이 상태로는 연못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구실을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일단 물을 다 퍼냈고, 그 공간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의논한 끝에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어 작은 정원을 꾸미기로 한 거예요.
오늘 아침에는 동화와 승로, 나는 알마시뗄로 갔고 혜란이와 하운이는 숙소에 남아 카심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열두 시 반쯤, 오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더니 혜란이가 찌개를 끓여 놓았어요. 김치찌개. 이 귀한 김치로 찌개를 끓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동화가 (동화가 요즘 우리 살림을 맡아 보고 있거든요.) 웃으면서 뭐라고 하기는 했지만 아마 다들 속으로는 좋아했을 거예요. 다른 건 아무 것도 들어간 것 없이 김치만 넣고 끓인 찌개였지만 참 맛있었습니다.
2. 놀이방 공사, 아이들
놀이방은 개관식까지 하고서 한 일주일 문을 열고 아이들을 맞다가 그 사고가 있던 다음 날부터 바로 문을 닫았습니다. 위험한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아이들을 한 쪽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야 했지요. 그 때까지 공사 책임을 맡던 상래 형은 암만으로 떠난 상태이고, 그런 가운데 공사에 대한 계획이나 진행은 남아 있는 놀이방 팀원들의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서는 동화가 그 책임을 맡았어요. 그리고 바로 지붕 공사와 연못을 메워 정원을 만들고 그 밖에 관정을 해 우물을 파거나 물탱크를 놓고 화장실을 짓는 일, 수영장 쪽에 모터를 놓는 일 따위를 진행하고 있는 거지요. 어차피 이 일들은 우리가 손수 할 수는 없고 이곳 현지인 기술자들이 와서 할 수 밖에 없는 일, 우리는 공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계속 의논을 하며 주변의 손이 필요한 일을 돕는 정도입니다. (아, 이 공사를 다시 시작할 때쯤부터 일주일 저는 집을 나갔다 왔구요.)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미안.
공사를 하느라 놀이방 문을 닫아도 늘 놀러 오는 아이들이 있어요. 하나 둘, 그러다가 대여섯, 열 남짓한 아이들. 요즘은 보통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놀러 와요. 알리라는 이름을 쓰는 아이가 셋, 무스타파, 제이둔, 샤카, 아흐메드, 노라……. 지금이야 아이들하고 무얼 준비해 놀거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날마다 이렇게 얼굴을 보다 보니 정이 참 많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우리 둘레에서 말을 걸거나 아랍말로 하나, 둘, 셋.... 열하나, 열둘 하고 세는 법을 가르쳐 주거나 여기 아이들 놀이를 가르쳐주곤 하고 그래요. 제이둔이라는 아이는 집에서 그림을 스무 장도 넘게 그려와서는 저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거기에 보니까 한글로 ‘제이둔’이라고 그려 넣었어요. 언젠가 아이들에게 이름표를 만들어 준 일이 있는데 그걸 보고 집에 가서 연습한 모양이에요. 오늘도 땅에다가 제이둔이라고 제 이름을 한글로 쓰고는 봐달라고 해요. 아, 귀여운 녀석.
아, 그리고 놀이방을 나오기 전에는 쓰레기를 줍곤 하는데 언젠가부터 아이들에게 같이 줍자며 “쓰레기, 쓰레기!” 했거든요. 빈 깡통을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주웠으니 아이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같이 주웠지요. 그래서 녀석들 참 귀엽고 기특하다 생각만 했는데 며칠 전부터 제이둔이 ‘스레기이, 스레기’ 하면서 무언가를 줍는 시늉을 내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게 뭐하는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내가 하던 “쓰레기, 쓰레기!”를 따라하는 거였어요. 얼마나 신통하던지. 아이들하고 쓰레기를 함께 줍는 일이 즐겁습니다.
어제는 오전 공사 때에 오랜만에 전기가 들어와서 놀러온 아이들하고 시청각실에 들어가 비디오를 봤어요. 사실 아이들하고 함께 볼 애니메이션을 아홉 개 준비해왔지만 몇 편 튼 것 가운데 아이들이 재미있게 본 건 <스노우맨>하고 <베어>였어요. 그건 따로 말이 없는 거잖아요. 다른 작품들은 말이 영어로 나오니까 아이들이 금세 말을 잘 몰라서 못 알아듣겠다고 하곤 했어요. 귀에다 손을 대고 이거 못알아듣는다고, 딴 거 보여 달라고. 그런데 어제 본 <우리 할아버지>는 아이들하고 참 재미있게 봤어요. 아니,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재미있게 봤나 몰라요. 그게 원래 존 버닝햄 아저씨의 그림책이라는 건 알았지만 사실 나는 그 그림책을 아직 못 봤거든요. 와,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행복했어요. 아이들도 중간 중간 웃으며 아주 재미있게 보았어요. 그건 영어로 된 대사가 나온 거였는데도 말이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다 끝난 뒤에 하나 더 보자고 해서 <화해의 선물>을 보았거든요. 이건 아마 짧은 것 몇 개가 있는 테이프 같은데 맨 처음에 있던 ‘소년과 기러기’. 이곳 아이들도 연을 만들어 날리고 놀거든요. 처음에 연을 날리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뭘 안다는 듯 막 떠드는 거예요. 이건 정말 아이들보다 내가 더 재미있어하며 봤어요. 끝에서 기러기가 떠날 때 소년이 손을 흔드는 장면에서는 나도 절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어요. 안녕!
어서 공사를 마쳤으면 좋겠어요. 며칠 전 카심 아저씨하고 함께 슬라이드 준비한 것도 아이들하고 어서 보고 싶어요. 그건 아랍어로 녹음을 했으니 아이들이 참 좋아할 텐데.
3. 그림책 슬라이드
아랍어로 번역한 그림책 글을 조금 늦게 받았지요. 놀이방을 개관하고 아이들을 만날 때만 해도 어서 준비를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아직 준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고가 났고 다시 공사를 해야 했지요. 그래서 준비하는 데는 조금 여유가 있는 만큼, 아이들을 만날 시간도 그만큼 늦추어졌습니다.
처음 원고를 받자마자 누구에게 부탁할까 하다가 옆집 할머니 댁에 찾아갔어요. 옆집에는 할머니하고 할아버지 두 분만 살거든요. 큰 집에서 둘만 살아. 그래서 많이 적적해 보여요. 전에도 우리가 놀러 가면 아주 좋아했어요. 우리가 자주 놀러왔으면 했지만 그리 못하고 지냈어요.
할머니는 예전에 초등학교 교사,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였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를 조금만 알아듣는 정도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려는 걸 말씀드리면 어쩜 다른 누구보다 더 잘하실 수 있겠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슬라이드 프로젝트랑 필름, 원고를 들고 찾아갔어요. 그런데 할머니네는 집에 발전기가 없는 거예요.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슬라이드 그림을 보여드릴 수는 없었지요. 한 컷 한 컷 그림을 넘기면서 원고를 보여드리면 감을 잡기가 더 수월할 텐데. 그런데 그림 없이 설명하려니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전기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그림과 원고를 다시 보여드렸어요. 그리곤 할아버지에게 읽어달라하고 녹음을 하려는데 할아버지는 그냥 읽으시는 게 아니라 읽다가 중간중간 저 그림은 뭐가 좀 이상하다느니, 저 그림은 어떻다느니 하는 말씀을 계속 사는 거였어요. 아이 참. 할아버지하고 말이 잘 되지 않으니 뭐라고 더 말하지는 못하겠고, 힘들어하시니 자꾸 다시 해달라고도 못하겠고. (그런데 중간 중간 그림 번호하고 원고 번호하고 짝이 안 맞는 부분들이 더러 있기는 해요.)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녹음을 했는데 아무래도 다시 해야 하겠어서 한 번 더 부탁을 드렸지요. 할아버지가 힘들어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할아버지가 한참을 읽어내려가는데 옆에서 보고만 있던 할머니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중간쯤부터 여기부터는 할머니가 읽어보실래요? 하고 할머니에게 부탁했어요. 오히려 할머니는 할아버지보다 적극으로 읽었어요. 우리가 바라는 게 어떤 건지도 더 잘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읽던 사이 또 전기가 뚝. 어쩌나, 기약도 없는 전기 올 때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다음에 다시 해달라고 부탁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무척 아쉬운 얼굴을 지었어요. 우리가 가져간 슬라이더랑 녹음기, 필름, 원고들도 그냥 집에 두고 가라면서 말이지요. 할아버지가 하는 동안 할머니는 곁에서 정말 하고 싶었나봐요.
집에 돌아와 앞으로 어떻게 작업을 할까 하다가 아무래도 할머니 댁에서 다 하기는 어렵겠다 싶었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를 테면 카심 아저씨)하고라면 일이 더 잘 될 텐데 했어요. 마침 그 날 저녁에 카심 아저씨가 다른 볼 일로 우리집에 들렀고, 앞으로 그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그 날 할머니네 집에서 하던 작품 ‘미스 럼피우스’만은 빼 놓고 꼭 할머니랑 같이 해야지 했어요.
카심 아저씨하고 같이 녹음을 하기로 한 건 그부터 사흘 뒤였는데 내가 그 다음 날 집을 나갔거든요. 승로랑 혜란이랑 카심 아저씨를 만나 아주 녹음을 잘 했다고 들었어요. 배경 음악까지 깔아 아주 멋지게. 그 날 한 게 <푸른 개>, <반쪽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번역한 원고를 받았고, 카심 아저씨와 녹음을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했다 했는데 일부러 카심 아저씨네로 가서 했어요. 일하러 가는 겸 아저씨네 집에도 다시 가 보고 싶었고, 아저씨네 막내 하이달이랑 넷째 레이쓰도 만나 놀고 싶었거든요.
아저씨네 집에서도 역시 전기가 들어올 때를 기다려 그 시간에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전기가 들어왔고, 마루 한 쪽에 그림을 켠 뒤 녹음을 했어요. 금세 아저씨네 집 마루가 멋진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아저씨하고 승로하고 서로 영어로 말이 잘 통하니까 어렵지 않게 했어요.
녹음을 하는데 레이쓰가 아주 좋아해요.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그런가 봐요. 막내 하이달이 칭얼대는 소리를 내면 조용히 하라고 달래면서 자기도 살금살금 다녔지요.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을 보며 내내 웃는 얼굴, 어떤 대목에서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카심 아저씨네 집에서 녹음 한 것 가운데 레이쓰가 가장 좋아한 건 <제랄다와 거인>하고 <괴물들이 사는 나라>.
하지만 그 날도 다하지 못하고 전기가 끊겨 다음 날 한 번 더 해야 했습니다. 카심 아저씨는 다음 날 오라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했지요. 다음 날 가니까 아주 맛있는 닭고기를 해 놓았어요. 밥도 맛있게 먹고 못다한 녹음을 마저 했어요. 이 때 카심 아저씨네서 한 건 <백만 번 산 고양이>, <엄마의 의자>, <눈 오는 날>, <피터의 의자>, <괴물들이 사는 나라>, <황소 아저씨>, <세 강도>.
이제 녹음도 어느 정도 마쳤으니 아이들에게 어서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영어로만 되어 있어서 보는 걸 좀 따분해했던 비디오하고는 달리 아이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요. 빛으로 그림을 쏘아 보는 것도 신기해할 테고 말이에요. 공사를 다 마치려면 아무래도 현지 평화팀을 해산하는 7월 말이나 되어야 할 거거든요. 저는 더 남아 아이들을 만나고 가려고 마음먹고 있어요. 아이들하고 더 많이 놀고, 잘 놀고 가고 싶어요.
하여튼 이 이틀 동안 일도 잘 되어 기분이 좋았지만 카심 아저씨네 아이들하고 노는 것도 무척 좋았습니다. 카심 아저씨네 식구들은 참 순해요. 어디 가나 착하고 순한 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은 참 행복해요.
4. 올드 바그다드
엊그제 오전에는 모두 함께 올드 바그다드에 다녀왔습니다. 꼭 다시 찾고 싶던 곳이었어요. 큰길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 그대로입니다. 아이들은 우리를 기억하는지 뺏지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쏘라, 쏘라!’ 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사진 욕심을 내어 몰려드는 아이들마다 사진기를 들이대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물론 뺏지나 사탕 같은 것도 주머니에 넣어 가지 않았고. 골목을 걸었습니다. 그대로였어요. 그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 조금 들어서다 보면 손바닥만한 공터가 나오지요. 그 공터.
사실 나는 다시 이라크에 오게 되면 그 공터를 이웃한 어느 빈집 정도에서 놀이방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처럼 큰길가에 있는, 커다란 대문을 지나 들어가야 하는 헬쓰 센터 안에 건물을 새로 뜯어 고치고 어쩌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지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마을 가운데 빈집이나 버려진 집 정도를 얻어 그 안에서 아이들과 같이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고, 놀이도 하며 말이지요. 때로는 골목길에서, 골목 안 공터에서 아이들과 놀며 말이에요. 집들이 다닥다닥 바로 이웃해 있으니 밥을 먹을 때가 되면 아이들 손을 잡고 집에 데려다 주고, 그러다 여느 아이네 집에도 놀러가고……. 정말 마을 안에 있는 놀이방. 아이들 엄마 아빠도 지나는 길에 들러 편안하게 구경을 하고, 때로는 찬 물이나 먹을거리라도 조금씩 집어다 주는. 그런데 막상 우리가 활동하게 된 알 마시뗄에서 놀이방을 짓고 있는 걸 보면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것도 마을이라면 마을이겠지만 큰길가에 뚝 떨어져 있는 건물, 거기에서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구조물을 바꾸고 하는 걸 보며 말이에요. 내가 그리던 것, 내가 바라던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
물론 아이들은 어디에서 만나는 아이들이나 다 같이 예쁘고 좋아요. 하지만 지금처럼 알 마시뗄의 헬스 센터 놀이방에서는 그저 찾아오는 아이들을 맞아 함께 지낼 뿐이에요. 품에 안기듯 모여 있는 하나의 마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큰길가, 그래서 큰 길을 넘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아이들이 놀러 오는 것이니 누가 어디에 사는지도 몰라요.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사는지, 아이가 대문을 열고 집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도, 그 아이의 부모나 형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어요. 물론 함께 공을 차고, 그림을 그리고, 놀이를 하는 것도 아이들을 만나는 거겠지만 그 아이가 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어울려 놀고 싶은 거였는데 말이지요. 이를 테면 우리 시골 마을의 마을 회관처럼, 도시 가난한 동네의 놀이방 공부방처럼.
팀에서 아이들을 위한 공간, 놀이방 같은 것을 계획할 때 나는 당연히 그런 모습을 떠올렸어요. 가구 수 오십 호가 되었건 그 보다 적거나 많건 어떤 마을에 들어가 사는 모습. 그렇게 마을에 들어가 살며 아이들을 만나 지내는 거. 따로 놀이방을 문을 여니 마니 할 것도 없이 그저 밥을 먹고 골목을 따라 나오면 놀이방이 있고, 놀이방에 놀다가도 집에 달려가 엄마 심부름을 하다가 다시 올 수 있는, 그런……. 그리고 나는 그런 곳으로 올드 바그다드를 떠올리고 있던 거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내가 한국에 돌아갔다 다시 나오기까지 한 달 남짓 동안, 계속 이라크에 남아 있거나 다시 바로 나온 팀원들이 구체적인 팀 활동에 대한 조사를 했지요. 처음에는 팀에서도 올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알아보았어요. 하지만 이곳(올드 바그다드)의 사정이 복잡해서 - 이 나라는 마을 마다 종교 공동체로 강하게 묶여 있고, 거의 모든 일을 그곳을 통해서 하는데 올드 바그다드에는 그게 복잡하다 했어요. 마을 안에 목타르(종교 공동체의 지도자)가 셋이어서 그네들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많다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일을 하려면 어느 목타르와 협의를 해야 하는데 어느 하나의 목타르와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한 쪽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되니 활동이 여의치 않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팀에서는 할 수 없이 올드 바그다드를 포기하기로 했고, 다른 지역을 찾다가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뉴 바그다드의 다섯 개 마을을 찾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듣기로 뉴 바그다드도 올드 바그다드처럼 빈민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지요. 쓰레기가 넘쳐나고, 아이들이 놀 곳이 없어 그 쓰레기 더미 위에서 논다고, 그래서 설사병 같은 온갖 병이 걸리곤 한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나는 자연스레 올드 바그다드를 떠올렸어요. 그곳과 닮은 또 다른 마을이겠거니.
올드 바그다드의 골목을 걸었습니다. 골목골목, 그 골목 앞의 아이들, 문간에 나와 앉아 있는 아주머니들. 하나하나 어쩌면 그렇게 눈에 박혀 오는지 몰라요. 잘 있었어? 잘 있었어? 잘 있었어? 잘 있었어? 잘……. 우리가 사진을 찍거나 뺏지를 나누어 주며 전처럼 호들갑스럽지 않아 그랬을까요? 아이들도 전만큼이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를 둘러싸고 따라다니지는 않았어요. 아아, 예전에 워낙 몰려들었던지라 그 때에 견주어 그만큼이 아니라는 거지 한 떼의 아이들이 여전히 우리 뒤에 꼬리를 이었습니다.
골목을 빠져 나와 약간 큰길이 보이는 곳, 그곳에 미군 탱크가 서 있었어요. 한 아이가 와서 굿 아메리카?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니, 노 굿 아메리카 했어요. 그러니 아이가 노 굿 아메리카! 하고 말을 바꿉니다. 그리곤 다시 굿 싸담? 해요. 나는 또 고개를 저으며 아니, 아니, 노 굿 싸담 하면서 이라키 굿! 하고 엄지를 올려 보였어요. 그러니 아이는 그 다음부터 노 굿 아메리카, 노 굿 부시 하면서 나에게 눈을 맞추었습니다. 아마 내가 굿 아메리카라고 했으면 아이는 내게 굿 아메리카, 굿 아메리카 했겠지요. 아이들은 그렇게 어른의 눈치를 살피어 굿 아메리카의 손가락을 들었다가, 굿 싸담의 손가락을 듭니다. (아, 우리 팀원들하고 오래 알아온 알 마시뗄 아이들은 괜히 아무 때나 옆에 와서 노 굿 아메리카, 노 굿 싸담, 코리아 굿! 하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걸 처음 듣는 팀원은 신기해하거나 재미있어 하면서 웃기 때문이지요. 코리아 노 굿, 이라키 굿! 이라고 고쳐주려는데, 이 녀석들 꼭 노 굿 아메리카에 노 굿 싸담 뒤에는 코리아 굿을 붙여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봅니다.)
골목을 다 지나고 마을 뒤편으로 갔습니다. 아, 강이 있었네. 전에는 골목을 다니다 바로 큰 길 쪽으로만 나가느라 뒤편으로 강이 흐르는 줄 몰랐거든요. 그런데 강이 흐르네. 강둑에 가 앉으니까 저 아래에서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놀고 있는 거예요. 와아. 경사면을 따라 강물이 찰랑거리는 데로 내려갔어요. 녀석들 우리가 와서 보고 있으니 더 신난 게지요. 자기를 봐 달라고, 뛰어내리다 첨벙 뛰어들 거라고, 갖은 폼을 다 잡으면서 물에 뛰어 들어요. 그런데 아이들 노는 바로 곁에 하수관에서는 더러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거였어요. 그게 그대로 강으로 들어가고, 아이들은 그 물에서 헤엄을 치고. 그래도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난 얼굴이었지요. 그 뜨거운 해 아래에서 물에 들어가 첨벙첨벙. 아이들이 하도 옷을 잡아당기고, 자기가 뛰어 내리는 것 좀 보아달라는 통에 먼 데 강물은 보지도 못했어요. 그렇게 한참을 아이들 노는 곁에 있었습니다.
몇 아이들이 나에게도 물에 뛰어들라고, 같이 수영을 하자고 자꾸만 밀어 넣으려 했어요. 나는 옷이 젖는다고, 안 된다고 사정을 하듯이 달아나곤 했어요. 아, 우리 집이, 우리 놀이방이 바로 조기 강둑을 나가 골목 안에 있더라면 나도 웃통을 벗고 뛰어들었을 텐데. 마치 석고개에서 아무 때나 개울에 뛰어들어 아이들하고 놀듯, 나도 첨벙거리며 뛰어들었을 텐데. 어쩌면 그거 핑계였을까요? 하수관에서 나오는 시커먼 물 때문에 나는 들어가지 않은 걸까요?
그만 강둑을 걸어 올드 바그다드를 돌아 나오는 길, 전쟁 전에 보았던 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아이를 하나 만났습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걸프전에 폭격으로 한 쪽 귀가 멀게 되었다는 그 아이. 전에 만났을 때에도 아주 기분이 좋아 이상한 몸짓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따라다니곤 했지요. 다른 아이들이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빙빙,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이라 가리키던, 그 아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어요. 가게들이 있는 길로 나오니까 그 길에 있던 어른들한테도 혼이 나더라고요. 마을에서 아주 천덕꾸러기인가 봐요.
마을을 다녀와서도 자꾸만 그 골목, 조그만 대문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선했습니다. 아쉬움 가져봐야 소용없는 건 줄 알면서도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그 골목께 어디쯤에 빈 집을 빌려 아이들과 지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대문만 열고나서면 아이들, 이웃들 사는 모습이 다 보이는 그런 데에서 아이들 집에도 놀러 다니면서. 운동장이나 놀이터, 수영장을 따로 만들지 않아도 그 골목 공터에서, 마을 뒤편 강물에서 어울려 놀며.
다음 날 알 마시뗄 놀이방에 나온 아이들 얼굴을 보니 아이들 앞에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아이들이 내 마음을 읽고 섭섭해 하기라도 한 듯 말이지요. 아이들만 보면 다 똑같이 예쁘거든요. 그저 제 욕심, 제 아쉬움이겠지요. 지금은 여기 알 마시뗄에서 우리 제이둔, 무스타파, 아프메드, 알라위 하고 얼마 동안이라도 행복하게 지내다 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5. 핫산과 세이프
(1) 핫산-1
전쟁 중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 다시 들어오면서도 마음 깊이에는 꼭 보고 싶은 얼굴이 몇 있었지요. 구두닦이 소년 핫산과 세이프. 그건 나 뿐 아니라 전쟁 전부터 함께 하던 다른 팀원들은 비슷한 마음이었어요. 얼마 전부터 혜란이는 촬영을 다니다가 예전 팀이 묵던 숙소 알 카리지에도 들렀고, 그 건물 옆에 있던 사진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다지 그 사진관 아저씨하고 이렇다 할 기억이 있는 건 아닌데 혜란이는 보다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아저씨 뒷모습을 보자마자 혜란이가 달려갔고, 아저씨도 처음에는 누군가 하다가 얼굴을 알아보고는 서로 펄쩍 뛰며 반가워했어요. 사진관에 들어가 아저씨와 반가움을 한참 나누다가 혜란이가 핫산 소식을 물었지요. 핫산은 늘 예전 우리가 머물던 곳 둘레, 팔레스타인 호텔과 알 카리지를 잇는 그 길을 다니며 구두를 닦았는데, 그래서 그 길을 다니면 핫산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이번에 들어와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핫산의 집을 안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진관 아저씨에게 다음번에 찾아오겠다 하고 그 때에 핫산네 집에 데리고 가 달라 했지요.
그 뒤에 혜란이와 하운이가 사진관에 두어 차레 더 다녀왔다 애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말이 핫산은 학교에 다닌다 하면서 같이 가 주지 않았대요. 아저씨도 영어가 짧아서 서로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는데 어쨌든 자꾸만 그 얘기만 했다는 거지요. 그리고는 아저씨에게 대충 어느 골목으로 가서 몇 번째 건물을 찾으면 거기가 핫산이 사는 데인지 얘기를 듣고 왔어요. 핫산이 학교에 다닌다고? 그래도 지금은 방학인데 왜 핫산네 집에 가자고 하면 자꾸만 핫산은 학교에 다닌다는 얘기만 하지?
그러다가 내가 집에 돌아와 가출 중에 만난 함멧 아저씨 얘기를 했습니다. 함멧 아저씨가 핫산네 집을 알거든요. 내가 전쟁 중에 들어와 핫산을 만날 수 있던 것도 함멧 아저씨가 핫산을 데려다 주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함멧이라는 택시 기사를 만났어, 그 아저씨가 핫산네 집을 알아! 그래서 우리는 함멧 아저씨를 찾아 그 아저씨와 함께 핫산을 만나러 가기로 했어요. 함멧 아저씨는 손님이 없을 때는 알 파나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요. 주로 호텔에 묵는 사람들을 상대로 차를 몰거든요. 그래서 알 파나에 찾아가 호텔 직원에게 함멧 아저씨를 아느냐고, 함멧 아저씨에게 전해달라고 쪽지를 남기고 왔어요. 내일 모레 오후 세 시 반쯤에 오겠다고, 그 때 핫산네 집에 데려가 달라고. 그리고는 알 파나에 다시 찾아가 확인을 해 보니 호텔 직원들이 함멧을 모른다는 거예요. 휴우, 그래서 어쩔까 하다가 언제 다시 알 파나에 가서 아저씨를 찾기로 했습니다.
(2) 세이프-1
며칠이 지나도 핫산을 만나기는 어려웠는데 세이프는 쉽게 만날 수 있었어요. 여러 가지 조사와 인터뷰를 위해 혜란이와 하운이가 팔레스타인 호텔에 자주 가거든요. 팔레스타인 호텔 앞에 가면 늘 세이프를 볼 수 있는 거지요. 세이프는 거리의 아이가 된 것입니다. 집 없이 팔레스타인 호텔 곁 잔디밭에서 자며 지내요. 바그다드 시내 어디나 앵벌이를 하는 아이나 여인들이 많지만 팔레스타인 둘레에는 특히 더 많아 보이거든요. 아무래도 그곳은 미군 기지가 있는데다가 기자를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이 드나드니 더 그렇지 않나 싶어요.
하루는 혜란, 하운, 승로가 도심의 밤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하룻밤을 시내에 나가 묵고 온 날이 있어요. 어차피 그 때 간 곳도 팔레스타인 둘레이니 세이프를 찾아 그 날만이라도 데리고 자려고 했다지요. 그런데 세이프가 싫다고 했대요. 예전 전쟁이 끝난 직후 핫산이 팔레스타인 호텔 곁 잔디밭에서 먹고 잔다 할 적에 내가 같이 자자고, 데리고 가려 했을 때에도 핫산이 싫다고 달아난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도 달래어서 어느 호텔로 함께 갔는데, 호텔 직원이 세이프를 보더니 방을 내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 안 되느냐고 싸우듯 따져 물어도 안 된다고.
혜란이와 하운이는 팔레스타인 호텔 둘레를 다니면서 세이프와 몇 번을 더 만났습니다. 바그다드 시내에 ‘가라다’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프랑스의 엔지오 단체가 와서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해요. 점심시간을 정해서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옷이나 신발 따위가 없으면 그것을 챙겨 주고. 아이들이 통 씻을 수 없으니 그런 아이들을 씻겨주기도 하며 말이지요. 혜란이와 하운이가 그곳을 알게 되어 세이프를 데리고 갔어요. 전에 볼 때만 해도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세이프가 맨발에다가 옷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거였죠. 가라다까지 가는 길, 세이프가 힘들어하며 걷다가 더는 못 걸었습니다. 아스팔트가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발을 딛을 수가 없던 거지요. 해서 하운이가 업어 그곳까지 데리고 갔는데 곳에 일하는 사람이 세이프에게 막 뭐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대충 지난번에 신발이며 옷을 준지가 며칠 안 되었는데 왜 또 잃어버리고 왔느냐는 얘기였죠. 신발은 벌써 세 번째 주는 거라 했어요. 아아, 그 까닭은 세이프가 아무리 이런 곳에 와서 새 옷이나 신발을 얻어 간다 해도, 어디에서 선물을 받는다 해도 그건 온전히 세이프의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둘레에서 세이프처럼 집 없이 지내는 아이들, 그 가운데 더 나이 많고 힘이 센 아이들이 빼앗아 가거든요. 좋은 옷을 입고 가면 그것을 벗겨 빼앗아 입고, 좋은 신발을 신고 가면 그것을 빼앗아 신고.
나도 혜란이, 하운이, 승로와 함께 그 쪽을 나갔다가 세이프를 만났습니다. 녀석이 나를 보더니 벌써 눈빛으로 아는 척을 해요. 그리고는 두 팔을 쭉 벌리고 나와 껴안았습니다. 세이프? 세이프! 놀라고 반갑고. 처음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들떠서 안고 좋아하다가 좀 지나 가만히 아이를 살펴보니 너무 말랐어요. 아니, 마른 건 둘째 치고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 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아주 당돌해 보일만큼 다부지고 씩씩해 보였어요. 아직 어린 애이지만 아주 단단해 보이는 느낌. 활달하고, 개구지고, 어디에 주눅들 일 없는 그런 모습. 그런데 다시 만난 세이프는 그 때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냥 가만히 보아도 훨씬 애기가 되어 있었어요. 단지 그게 마르고 몸에 힘이 없어 보이는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가만히 있다가도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을 보이곤 했어요. 세이프, 왜 그래? 왜 이렇게 애기가 되었어, 세이프 너가 얼마나 씩씩했는데…….
(3) 핫산-2
사진관 아저씨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부탁하기가 어렵고, 택시 운전을 하는 함멧 아저씨는 어떻게 만나야할지도 모르겠고, 일단 알 파나 호텔로 가서 혹시 함멧 아저씨가 나와 있나 찾아보고 안 되면 사진관 아저씨가 설명해준 대로 우리끼리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세이프가 집을 아니까 세이프하고 같이 가는 것도 좋겠다 하며 말이지요. 혹시나 하고 알 파나에 가봤지만 함멧 아저씨를 만나지는 못했어요.
팔레스타인 호텔 앞에 가서 세이프를 데리고 왔어요. 요즈음 우리를 만날 때마다 세이프 얼굴이 아주 밝고 좋아요. 세이프는 승로가 가지고 다니는 씨디 음악 듣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보자마자 귀에 이어폰 꽂는 시늉을 내면서 씨디를 달래요. 그리고는 음악을 틀더니 몸을 흔들흔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음악을 타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여요. 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텐데도 아주 감정을 모아가면서 가사를 따라하기도 하고. 에으, 녀석 얼마나 귀여운지.
세이프가 핫산의 집을 정확히 알기는 알아요. 우리를 태워주던 아부알리 아저씨하고는 서로 아랍말이 되니까, 집이 어디냐, 어느 골목으로 가면 되느냐 묻는데 아주 간단히 길을 가리켜요. 그리곤 얼마 가지 않아 곧 핫산네 집을 찾았습니다. 어느 허름한 공동주택의 5층 꼭대기.
혜란아, 먼저 너만 같이 가봐. 한꺼번에 우리가 다 가면 쫌 그럴 거 아니야?
아니, 그냥 세이프 혼자 가서 핫산에게 나오라고 해요.
왜애? 너하고 같이 올라가 봐.
그러는 사이 세이프가 차에서 내려 저만치 앞으로 걸었고, 그 때야 혜란이와 하운이가 따라 내렸습니다. 나와 승로, 동화는 차 앞에 내려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세이프가 누군가와 만나 얘기를 했어요. 건장한 청년. 핫산의 형이래요. 우리가 핫산을 만나러 왔다는 걸 알고 핫산의 형이 건물 꼭대기에 대고 소리쳤어요. 그러니 베란다 창틀 같은 데로 어린 아이 둘이 나왔어요. 아, 핫산 동생이다, 동생!
핫산이 집에 없대요. 어디로 놀러나갔다는데 핫산의 형이 우리를 이끌고 티그리스 강변 쪽으로 갔습니다. 강변을 따라 나 있는 찻길에 늘 서 있는 미군 탱크가 있는데 아마 핫산이 거기로 자주 놀러가는 모양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핫산은 없네. 핫산의 집을 찾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들떴지만 어서 핫산을 만나고 싶었어요. 핫산이 그 미군 탱크 앞에 없다는 걸 알고 다시 걸어들어오는데 핫산의 형이 자기 집에 올라가자 해요. 어떻게 할까, 집에 가서 좀 기다릴까 하다가 이왕 게까지 간 거 집에 올라가자고 했어요. 집에 동생들도 많아 보이니 먹을 걸 좀 사가지고 가야겠다 해서 혜란이와 나는 가게를 찾았죠.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와아, 와아! 언니, 언니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하운이와 승로가 지르는 소리였죠. 혜란이가 먼저 듣고 뒤돌아섰는데 오빠! 핫산이야 하더니 막 달려가는 거예요. 아, 정말 핫산이네. 핫산. 아이들이 핫산을 둘러싸고 아주 좋아했습니다. 나는 좀 늦게 걸어오느라 멀리에서 녀석 얼굴을 보았는데, 아 똑같아요.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대로예요. 그러더니 핫산이 나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그래, 핫산. 핫산! 핫산을 안고 빙그르 한 바퀴.
핫산네 집에 올라갔어요. 혜란이와 나는 먹을 걸 사가지고 가야겠다며 과자점이랑 음료수 가게를 다녔는데, 가게마다 물건을 담아주는 게 왜 그렇게 더딘지 마음은 벌써 핫산네 집에, 아주 궁금해 죽겠는 거예요.
5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정말 허름한 아파트. 집에 들어서니 좁은 마루에 사람들이 꽉 찼어요. 우리 팀원들이 갔으니 더 그렇기도 했지만 워낙 하산네 식구가 많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 게다가 이 날은 친척인지 이웃인지 어른들이 몇 더 있었어요.
그렇게 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어렵게 찾았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어요. 마루에 들어가서도모두들 핫산을 둘러쌌어요. 핫산의 어린 두 동생도 얼마나 귀여운지 팀원들 예쁨을 많이 받았고요. 영화 찍는 카메라를 돌리고, 사진기로 찰칵찰칵. 가져간 과자와 음료수를 내 놓았는데 워낙 손님이 많아 음료수가 모자랐네. 하나씩 집어 들었는데 베란다에 나가 있던 세이프가 들어와 음료수를 찾아요. 어, 어떻게 하지? 없네. 상 위에 누가 따 놓은 콜라가 있어서 그걸 주니 됐다 하면서 도로 베란다로 나가요. 그런데 그 때 잠깐 스치는 얼굴빛, 1초도 안 되는 잠깐 사이였지만 분명히 보았습니다. 무언가 크게 서운하고 서러운, 그래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
(4) 세이프-2
걱정을 하기는 했어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세이프를 만날 때 모두들 세이프만 둘러싸고, 세이프에게 눈을 맞추고, 기쁜 얼굴을 보였는데 핫산을 만나게 되어 모두들 핫산에게로 그 마음이 쏠리면 옆에 있는 세이프는 소외된 마음을 갖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정말이었어요. 핫산네 집에 가서 모두들 핫산과 그 동생들을 둘러싸고 반가워하며 좋아할 때 세이프는 혼자 베란다에 나가 먼 데만 보고 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음료수마저 제게는 돌아오지 않으니 순간 더 울컥하는 얼굴이 되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얼굴을 보았으면서도 세이프에게 어떻게 더 잘 해주지 못했습니다. 핫산을 만난 게 너무 반가워 진정이 안 된 거였지요.
핫산은 정말로 학교를 다닌대요. 어떻게 된 일인가 물어보니 독일의 어떤 단체에서 핫산을 알게 되어 학비를 대주기로 해서 한 달 전부터 다녔다고 말이지요. 핫산에게 책가방을 보여 달라고 하니까 아주 신이 나서 이불을 밟고 올라가 장롱 위에 있는 가방을 꺼내 와요. 공책을 보니까 글씨를 연습한 게 보여요. 핫산, 이거 니가 쓴 거야? 이제 글씨도 읽을 줄 알아? 핫산에게 이름을 써보라고 하니까 아주 자랑을 하듯이 이름을 써요. 와아. 그럼 그 아래 내 이름도 써 줘. 로아이, 내 이름이 로아이야. 그런데 그건 쓸 줄을 모르네. 이제 자기 이름만 쓸 줄 알게 된 건가 봐요. 에이, 나도 핫산에게 내 아랍 이름 쓰는 거 배우려고 했더니. 공책을 몇 장 넘기다 보니까 .그림 그린 것도 있어요. 집이 있고, 나무가 있고, 강이 있는. 핫산, 그림도 그려? 이거 너가 그린 거야? 나도 하나 그려줘. 여기에 내 얼굴 그려줘. 내가 졸랐어요. 그래서 핫산이 내 얼굴을 그려주었습니다. 해해.
핫산이 그려준 그림을 받고 좋아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베란다로 나가보았어요. 세이프는 여전히 씨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먼 데를 내다보고 있었어요. 세이프, 세이프. 여기에서 뭐해? 음악 듣는 거 좋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에 세이프에게 부러 더 말을 걸었어요. 그런데 세이프 얼굴빛이 정말 좋지 않아. 내 얼굴을 한 번 슥 보고는 다시 먼 데만 쳐다보았습니다. 그 조그만 어린애 눈빛이 어쩌면 그렇게 깊고 쓸쓸해 보일 수 있는지. 세이프에게 몇 번이나 더 말을 걸며 곁에 있었지만 세이프는 무언가 서러운, 서글픈 얼굴로 먼 데만 보았습니다. 혹시 그거 내 감정이 아이에게 이입된 걸 그렇게 느낀 걸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누가 보아도 세이프는 아주 슬픈 얼굴이었거든.
옆에 있던 하운이에게 그 얘기를 했어요. 세이프는 여기 핫산네 집에 와서 울적해졌나봐. 하운이도, 혜란이도 세이프 얼굴을 보며 마음 아파했어요. 우리가 잘못했나봐. 세이프하고 같이 오는 게 아닌데…….
핫산네 집에는 우리 아랍어 통역자가 같이 올라가 있었어서 세이프에게 몇 가지 얘기를 물었어요.
-세이프, 세이프네 집은? 식구들은?
=세이프네는 식구가 모두 열이래.
-그런데 세이프는 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나와서 지내?
=세이프네 집은 무척 가난한데 아버지가 쫓아냈대. 아버지가 나가라고 했대.
그랬구나, 그랬구나 세이프.
-그럼 이것도 물어봐줘. 여기 세이프 얼굴 있잖아. 얼굴에 난 상처. 이건 왜 그런지.
=엄마가 그랬대.
-엄마가?
=엄마가 칼로.
정말 놀랐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어서 아이 얼굴에까지 칼을 대야 했을까? 미안했어요. 세이프는 계속 딴 데만 보고 있다가 겨우 짧게 대답을 하곤 했거든요. 게다가 세이프에게 물어보는 통역자 말투가 혼을 내거나 다그치는 것 같았거든요. 여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별로 친절하거나 다정하지가 않아요. 그게 아닌데,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데 통역자 입만 거치면 질문이 이상하게 되어 전해지는 거예요. 더는 세이프에게 대답하기 어려운 거, 말하고 싶지 않은 거 묻지 않아야지 하면서 무얼 물을까 하다가
-세이프에게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고, 그것 좀 물어봐줘.
=낫씽. 아무 것도 없대. 5달러가 있으면 좋겠대.
-음……. 그러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고, 먹는 것 중에 뭐가 제일 좋으냐고.
=닭고기랑 밥이랑 그런 거.
-그래? 그럼 세이프 하루에 밥은 얼마나 먹나 물어봐 줄래?
=어떤 때는 하루 한 번, 어떤 때는 두 번. 그런데 아무 것도 못 먹는 날이 많대.
-그럼 먹게 될 때는 그 먹을거리를 어떻게 마련한대?
=미군이 던져주는 거.
저쪽에서는 핫산이 여전히 신이 난 얼굴로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세이프 얼굴은 더 굳어지거나 울먹이는 것 같았고. 미안, 세이프. 미안.
우리 오늘 세이프랑 저녁 같이 먹고 가자. 닭고기 먹으러 가자. 어차피 팀원들 모두 나왔으니까 다 같이 세이프랑 닭고기 먹고 가자. 근데 핫산네는 이제 집도 알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놀러오기로 하고 오늘은 세이프하고만 같이 가자. 세이프랑만. 그리곤 세이프에게 말했어요. 귓속말처럼 하여 세이프에게 말했어요. 세이프, 이따가 우리 닭고기 먹으러 가자, 응? 핫산은 빼고, 우리끼리만. 그랬더니 그제서야 세이프가 웃어요. 핫산네 집에 들어가 처음으로 밝게 웃었나봐. 여태 핫산네 집에 와서 혼자만 외롭고, 혼자만 떨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서럽고 서글프고 그랬는데 핫산 빼고 자기하고만 밥 먹으러 가는 거래니까 그 말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나봐. 애기는 애기지 뭐야.
(5) 핫산-3
베란다에 앉아 있다가 핫산의 구두 통을 보았어요. 핫산, 핫산! 구두 통을 가리키니 핫산이 와서 아주 능숙하게 서랍을 열고 구두 솔을 만져요. 그래 맞아, 너 맨날 이거 메고 다녔잖아. 구두 통 앞에 앉은 핫산을 보니 이제야 정말 핫산 같아. 아이들이 사진을 찍자고 하여 그 베란다에서 사진을 찍는데 그냥 뭉텅이로 모여 앉았더니 핫산이 그게 아니래. 구두통을 가져가서 턱 자리 잡고, 깡통 의자를 받쳐 앉는 거예요. 세이프랑 핫산이랑 핫산 동생들이랑 가 같이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아, 핫산이랑 세이프랑 우리가 준비한 놀이방에 데려가 같이 놀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놀고, 같이 어울리고, 같이 뒹굴고, 그림도 그려보고, 영화도 함께 보고. 그런데 너무 멀어. 그래도 나중에 팀원들하고 같이 의논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좋을 거야.
이제 하산네 집이 어디인지 알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놀러가야지요.
(아참, 예전 전쟁 직후에 핫산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의 세이프처럼 팔레스타인 호텔 둘레 잔디밭에서 자며 지낼 때 핫산이 그랬거든요. 이제는 집이 없다고, 아버지 어머니 모두 떠났다고. 그래서 그 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았어요. 핫산의 부모가 핫산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난 줄. 그런데 이렇게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걸 보니 그 때 상황이 잘 맞지 않아 다시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형 말이 핫산이 아무래도 집에 들어가기 싫어 거짓말을 한 모양이라고.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게 맞는 말인지. 식구들이 돌아온 건지.)
(6) 세이프-3
그만 핫산네 집을 나서려고 모두 아부알리의 봉고차에 올라탔어요. 세이프는 차를 타니까 좋은가 봐요. 그러다가 핫산이랑 핫산 동생들이 차 문 앞에 와서 우리와 인사를 나누니까 얼굴이 굳어지면서 승로, 혜란이, 하운이에게 팔을 내밀어 뽀뽀를 해요. 꼭 ‘이것 봐라, 내가 더 친하지?’ 하는 것처럼.
핫산과 세이프는 동무였어요. 함께 구두통을 메고 다니던. 그런데 지금은 둘의 처지가 그렇게 달라요. 그렇다고 뭐 핫산의 처지가 대단해진 건 없고, 여전히 가난한 집의 아이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세이프와 함께 닭고기를 파는 집에 가서 밥을 먹었어요. 닭요리가 나오기 전에 무슨 샐러드 같은 접시에 든 반찬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세이프가 좋아하는 게 있더라고요. 혼자 그것 한 접시를 다 먹었어요. 그리고 또 다른 접시에 든 걸 먹으려 하기에 쫌만 참으라고, 나중에 고기랑 밥 나오면 그거 많이 먹으라고 하는데도 자꾸만 그리 손이 가요. 그리고 나서 정작 닭고기와 밥이 나왔을 때는 얼마 못 먹었어요. 어쩌면 그게 당연하겠지요. 아직 어린애인데다 늘 굶다시피 지냈으니 갑자기 많이 먹을 수 있겠어요? 그래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밥집을 나오며 먹지 않은 음식을 그대로 쌌어요. 세이프, 이거 가져가서 먹어. 친구들하고 같이 먹어, 응? 글쎄 가져가봐야 얼마 먹지는 못할 텐데. 세이프를 팔레스타인 호텔 앞에 내려주면서 고기하고 같이 먹을 음료수를 사러 몇 사람이 가게에 갔어요. 기다리는 동안 세이프가 나보고 이리 오라더니 어디를 같이 가자고 해요. 어디? 그저 세이프를 따라 걸었습니다. 딱히 어딜 가고 싶은 데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에요. 여전히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한 손으로는 씨디 플레이어를 받쳐 들고, 마치 가수들처럼 몸을 흔들흔들 춤을 추며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세이프와 동행인 줄 모르는 이들이 세이프를 불러 씨디 플레이어에 관심을 보였어요. 달라고 하는 것도 같고 해서 내가 가 안 돼, 안 돼 했지요. 청소년 나이가 되어 보이는 아이들도 세이프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갑자기 아까 차 안에서 하운이가 세이프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어요. 세이프야, 나쁜 짓은 하지 마 하고 얘기하던 거. 나쁜 짓, 그게 뭔데? 물었더니 하운이가 두 손으로 코와 입에 가져대는 시늉을 했어요. 뽄드? 응.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 십대의 아이들 앞에서 세이프 손을 꼭 잡았습니다. “너네들, 세이프한테 잘 해 줘야 해, 응? 세이프, 잘해줘.”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한국말로 그렇게 말했어요. 그네들이 알아듣게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 마음에 그저 한국말이 튀어나왔어요. 세이프, 괴롭히면 안 돼, 알았지? 잘 해 줘.
세이프는 그렇게 내 손을 잡고 팔레스타인 둘레 이곳저곳을 걸었어요. 그러면서 약간은 새침하게 이어폰을 낀 채 춤을 추면서 나를 마이 프렌드라고 소개했습니다. 으응, 그래. 세이프는 지금 나를, 누군가를 자랑하고 싶은 게로구나. 자기를 무시했던 힘센 아이들, 또는 어른들에게 자랑이 하고 싶은 게로구나. 왜 어렸을 적에 형 없는 애들이 사촌 형이나 삼촌이 오면 우리 형이라고, 우리 삼촌이라고 아이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세이프는 팔레스타인 앞을 지키는 탱크 앞으로도 갔어요. 더는 가까이 못가도록 끈이 쳐 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 안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어폰을 끼고, 씨디 플레이어를 든 채 흔들흔들 춤을 춰요. 탱크 안에 있던 미군이 나와 보니까 그네들에게 나를 프렌드라 소개해요. 그리고도 세이프는 엉덩이를 힐쭉힐쭉 춤을 추며 더 까불다가 돌아나올 때에는 장난을 하는 것처럼 미군들에게 뻑큐를 한 방 날리더라고요.
세이프는 더 돌아다니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팀원들이 우리를 찾고 있는 게 보여 그만 돌아섰습니다. 세이프, 외로웠던 거구나?
세이프를 팔레스타인 호텔 앞에 남겨두고 그만 아부알리의 차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 나오는 길. 다들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세이프와 그 친구들도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고 몇 걸음에 한 번씩 뽀뽀를 퍼부어 댔어요. 나는 일부러 성큼성큼 앞서 걸었습니다. 뒤에 아직 아이들과 작별 인사가 끝나지 않은 팀원들이 있어 잠깐 멈추어 섰는데 내 발 앞에 웬 개 한 마리가 보였어요. 순한 녀석. 겁을 내는 것 같기는 한데 내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어요. 그 앞에 한참이나 쪼그려 앉아 개를 만졌습니다. “너는 먹을 거나 잘 얻어먹고 다니는 거니?” 개는 두 눈만 껌벅껌벅. 마음이 되게 힘들었어요. 아까부터 어서 빨리 혼자 있을 수 있는 데로 갔으면 했는데 끝내 그 개에게 들켜버리고 말았지요.
아마 나에게 이라크는 핫산과 세이프로 남지 않을까 싶어요.
6. 한 밤의 총격
엊그제 밤이었구나. 아, 맞다. 핫산과 세이프를 만나고 온 밤. 밤이었습니다. 밤 열 시 반 무렵이었던가? 나는 안주 없이 그냥 술을 먹고 있었지요. 총소리. 이곳에서는 총소리에 무감각해 있어 처음에는 별 일 아니라 생각했어요. 늘 들리는 소리니까요. 그런데 여느 날하고 다르게 그 소리가 격렬한 거예요. 그리고 방향도 하나가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들려왔어요. 그래도 곧 잠잠해지겠거니 했지요. 조금 이상하다 느꼈지만 마음이 한참 가라앉아 있는지라 일부러라도 별일 아니겠거니 여기려 했어요. 무슨 일인지 나가 보거나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게 계속 되네. 십 분이 넘게 지나는데 총소리는 잦아들기는커녕 더 거세어졌어요. 그리고 아주 가깝게 들렸습니다. 그제야 잠깐이라도 나가보아야겠다 싶어 일어났습니다. 먼저 혜란이를 불러 못 들었느냐고, 같이 지붕에 올라가보자고 카메라를 챙기라 했습니다. 아, 마치 폭죽을 쏘아대는 것처럼 하늘로 총탄이 날아다녔어요. 그리고 방안에서 듣던 소리처럼 한 곳이 아니라 우리 숙소를 둘러싸고 빙 둘러가며 총알이 솟아올랐습니다. 다다다다다, 다다다다다다. 한 가지 이상한 건 총을 하늘로 쏘아댄다는 거였지만 그게 보통이 아니었어요. 무슨 일일까? 처음에는 하늘로 쏜다는 게 너무 이상해서 혹시 오늘이 무슨 기념일 같은 건가 했어요. 그런데 무슨 기념일이라 해도 그렇지 이렇게 한 밤에, 그것도 여러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총을 쏘아댈까? 그럼 무슨 일이지? 교전? 교전 상황이 간간히 없지 않았으니 그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는 했지만 어느 방향 할 것 없이 거의 시내 전역에서 그런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것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시간에. 그럼 도대체 무슨 일? 우리는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 채 불꽃을 튀며 날아다니는 총탄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대문 앞으로 미군 탱크 두 대가 지나갔어요. 뭐 그것도 아주 없지는 않던 일이기는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한 채 이런 저런 상황을 그려볼 뿐이었습니다. 혹시 지난 번 시내에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슬람 무장 세력이 그 어떤 약속을 하고 선전 포고 같은 걸 하는 게 아닐까….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방으로 내려가기에는 총소리가 워낙 거세었습니다. 왠지 저 소리가 잦아들기라도 해야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데 삼십 분 넘게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그 격렬한 총격은 계속 되었습니다. 조금 잦아졌다 싶어 방으로 내려와서도 간간히 총소리는 한참이나 더 이어졌지요.
다음 날 아침 카심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아저씨에게 물어봤어요. 총소리, 어제 그 총소리가 뭐냐고. 우리가 예상하던 건 다 아니었어요. 지난 밤 모슬이던가 그 쪽에서 싸담의 아들이 죽어서 싸담을 반대하는 편 사람들이 축하하는 총포를 쏘아댄 거였습니다. 그런다고 그렇게 격렬하게 총을 쏜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는 한참 전기가 끊겼다가 전기만 들어와도 총을 쏘곤 하니까요. 알마시뗄 놀이방 가는 길에 그 옆에 있는 미군에게 물어보다도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놀이방에는 그 날도 열 남짓한 아이들이 놀러왔어요. 그늘 아래에서 아이들과 모여 앉았는데 아이들이 손뼉을 치면서 박자를 맞춰 무슨 노래를 하는 거예요. 나는 여기에서 아이들이 그렇게 흥겹게 노래 부르는 걸 처음 보는 거라 그저 좋기만 했어요.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노래하는 모습도 참 보기 좋았으니까요. 노래하는 사이사이 아이들은 무슨 얘기인가를 저희끼리 나누었거든요. 승로가 아이들 얘기를 좀 알아듣고 얘기해주었어요. 이 애들 지금 바트당 어쩌고 하는데 아마 어제 있던 일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가만 보니 정말 그래요. 나중에는 아이들이 하늘에 대고 총을 쏘는 흉내를 내기도 했고.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지하드가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저쪽 나무나 사다리 있는 데에 기대고 섰어요. 지하드는 여기 놀이방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늘 놀러온 아이인데, 우리 팀원들에게 인기도 많고 귀여움을 독차지 하다 시피한 아이거든요. 지하드, 폼 잡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놀아! 그저 오늘 따라 얘가 왜 이러나 할 뿐이었어요. 그런니까 승로가 또 얘기해 주기를 지하드가 기분이 안 좋은가 보래. 지하드 아버지는 후세인 지지자인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지하드네 집 분위기가 아주 나빴나 보다 하면서. 그래서 또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로 지하드 기분이 안 좋아요. 괜히 아이들에게 심통을 부리는 것도 같고. 지하드도 아이들이 둘러앉은 자리에 왔는데 알라위를 비롯해 몇 아이들이 좀 전에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려니까 나뭇가지로 알라위를 때려요. 그러더니 싸담 어쩌구 하는 말만 나오면 지하드가 아이들에게 하지 말라고 그러는 것 같아. 정말 그렇구나, 그런가봐.
어제 저녁이었습니다. 놀이방에 다녀오는 길, 동화와 승로가 유엔에 들러 걸어왔는데 오다가 옆집 할머니를 만났대요. 그 할머니 말이 우리 집 바로 건너편에 사는 아저씨가 지난 밤 죽었다고. 총에 맞아 죽었다고. 그게 지난 밤 총격과 관련이 있는 건지, 또 다른 어떤 사고가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곳에는 총을 쏘는 사람들이 있고,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7. 안녕!
거의 일주일만에 메일을 보내나 보다. 그 동안 인터넷을 하러 가지도 못했어. 혹시 그 사이에 내가 꼭 받아보아야 할 연락이나 그런 게 있지는 않았겠지? 혹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여기 집 전화로 걸면 되니까.
엊그제는 오후에 기차길옆 큰삼촌하고 큰이모에게 전화가 왔거든. 이 웬수덩어리야 하고 웃는데 그 목소리 들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속 좀 썩이지 말라고, 이젠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헤헤. 아, 내 한미르 메일이 잘 안 되나 봐. 편지함이 꽉 찬 것도 아닌데 그 동안 보낸 메일이 모두 되돌아간다고 그러대요. 그것도 바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어떤 건 일주일, 어떤 건 열흘 지나서야 안 간 거라 나오면서 되돌아간다고. 내가 보내는 메일도 늦게 가고. 지난 주 보낸 게 어제 갔다면서. 요사이에는 진보넷 메일도 열어보니까 그리로 보내고 받고 할 게요.
요즘은 가끔 책도 읽고 그래요.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책을 몇 권 넣어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산문으로 된 글은 거의 못 읽고 그랬거든. 그런데 요사이에는 좀 보곤 해요. 하나는 할머니들이 들려주는 얘기를 그대로 받아 적은 건데 이런 걸 민중 자서전 그런 거요. 할머니들 얘기 구구절절이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세월인데도 할머니들 얘기 듣는 게 정말 좋아요. 그래, 맞아. 이 책에 있는 할머니들 얘기는 읽는 게 아니라 듣는 거지. 예전 글쓰기회 숙제 한답시고 한 달 넘도록 녹음기 들고 석고개 할머니들 쫓아다니던 기억도 나고, 어머니학교에서 엄마들 얘기 듣던 것도 생각나고. 아, 내가 여기 이라크말만 자유롭다면 여기에서도 그럴 텐데. 녹음기 하나 들고 그냥 까만 아바야 둘러쓰고 있는 할머니들 쫓아다닐 텐데. 할머니, 할머니는 어떻게 살아왔어요? 할머니 옛날 얘기 해주세요. 할머니네 자식들 얘기, 할머니가 젊어서 한 일 애기, 살면서 가슴 아팠던 얘기, 지워지지 않는 얘기, 할머니에게 마지막 남은 소망…….
한국은 장마라면서요? 좋겠다. 우리 죽변 집에는 잡풀들이 내 키만큼 쑥쑥 자라 있겠네. 모두들 건강하세요. 안녕! (2003. 7. 24. 22:00)
아참, 프랭스 형. <강아지똥>이랑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 그것도 되는대로 번역한 거 보내줘요. 그런데 첫번째 보낼 때처럼 아랍어랑 한글이랑 번갈아가면서 해 보내면 그림이랑 글이랑 짝을 맞추기가 더 좋은데.... 그리고 지난 번 보낸 메일이 첨부파일 가운데 2메가가 넘는 게 있더라고. 그거는 못 봤어요. 뭐더라? 이거 플로피 디스켓이 끽해야 1.44메가잖아. 그래서 그거 둘로 나누어서 보내면 좋겠어요. 응, 그럼 진짜 안녕!
박기범의 이라크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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