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나를 지켜준 사람
전화가 안 돼니 인터넷도 안 되지요.
풀을 뜯다 인터넷 방으로 나왔어요.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오랜만에 무슨 말이든 끄적여 놓고,
그리고 한참 전부터 꼭 해야겠다 하던 걸 해 놓으려고.
한참 전부터 해 놓으려던 건 다름이 아니라
김중미 선생님의 편지를 정리하는 거였어요.
한국을 떠나면서 급히 만든 피쓰이라크 한미르 편지함에는
지금 받은편지, 보낸편지, 안 읽은편지 그런 거 말고 편지함 하나가 더 있거든요.
'김중미'라고 이름지어 놓은 편지함.
*
내가 한국을 떠나 있던 것만 예순 몇 날인데,
그 편지함으로 따로 모아 놓은 것만 서른 몇 통이니
거의 이틀에 하나씩 들어왔지요.
바그다드에서 인터넷을 쓸 수 없어,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던 시간을 빼면
사실 날마다 편지가 들어온 꼴이었어요.
짬을 내어 인터넷을 쓸 수 있을 때 들여다보면
꼭 이모가 넣어준 편지가 놓여 있던 거예요.
그 마음, 하루하루 퍼질러지기만 했어요.
정말 저 가까이 아는 분들 지금도 걱정하시는 것처럼
지 마음 어쩔 줄 몰라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 하면서 울어 울어 울기만,
참을 줄 몰라 했을 거예요.
그 때마다 이모가 새로 채워주는 편지를 읽었어요.
이모의 마음, 이모의 목소리는 그것 그대로 내게 말씀이 되었어요.
생명처럼 졸졸졸 흘러 다시 살려내어 주는,
그리고 나면 무언가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있는.
그 편지로 하루를 다시 살고, 다시 일어서고 했다 해도
아주 틀리지 않을 거예요.
그랬어요,
그렇게 해주었어요, 그 편지들이.
*
이모가 보내어 온 편지들을 이곳 게시판에 올려야지 했던 건,
그건 저에게 보내주는 편지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모가 가꾸어온 사랑이라거나 평화라거나 용기라거나 목숨에 대한 절절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아름다운, 아무나 그리 얘기할 수 없는.
그래서 지난 번 만났을 때 살짝 얘기하기는 했거든요.
'나 이모 편지 다른 사람들 보게 해도 되지, 응?
정말 아주 아주 감동인데....'
이모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웃기만 했는데,
나는 그걸로 허락받은 걸로 치고
오늘은 정리를 해서 올려야지 하고 있던 건데
아까 요 까페에서 접속자 대화창에서 이모를 만난 거예요.
-이모, 나 지금 이모 편지 정리할 거다.
그랬더니 이모가 자기한테 먼저 보여준 다음에 허락받아 올리래요. 히잉.
나는 그 편지들을 어서 보이고 싶어하나 봐요.
그래서 여태 그 편지들을 하나 하나 다시 보며
디스켓에 옮겼어요.
모두 76쪽.
집에 가지고 가서 종이에 뽑아 다시 보려 해요.
(그래도 나 반칙한다. 그 중 하나 요 아래에 붙여요.
날짜를 보니, 바그다드 폭격은 점점 더 심해가고 있고,
저는 비자를 얻지 못해 요르단 발이 묶여 마음으로는 가장 힘겹게 지내고 있을 때였어요.
그 때 이모가 들려주었어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어내어야 하는지....
눈물을 흘리려거든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3/29 편지 가운데에서.
오늘 소식을 보고 마음이 놓였어요. 다른 나라 평화팀과 연대하게 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어려운게 없진 않겠지만 그렇게 서로 힘을 모으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기범씨도 힘을 얻겠죠?
오늘 전화를 한다는 게, 아기랑 씨름하다 시간을 놓쳤어요.
요즘은 정말 아무 것도 하지 못해요.
오늘은 처음으로 냉이를 캐러 갔었죠.
참, 다람쥐를 만났어요.
주린 배를 채우려고 욕심을 부렸는지 볼이 빵빵하도록 뭔가를 물고 있더군요.
꼭 우리 아기 같았어요. 반짝이는 눈과 먹을 욕심까지.
도망가지도 않고 한참 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어요.
힘들어하고, 뒤에 쳐지있기도 하고, 무력감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 순간도 그냥 받아들여요.
기범씨 혹시 간음한 여자 얘기 알아요? 성서에 나오는.
간음한 여자를 바리사이파들이 끌고 와서 돌팔매질로 벌을 주려고 할 때, 예수가 말했잖아요.
너희들 중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만 돌멩이를 던지라고.
그리고 그 다음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땅에다 뭔가를 쓰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잖요.
그게 숨돌리는 시간이래요. 그 침묵이 저항이래요.
때로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 같은 시간이 더 의미 있을 수 있어요.
사람들을 만나며 다시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요르단에서라도 아이들을 만나구요.
밖에서 힘을 얻지 못할 때, 결국 자기 안에서 힘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잖아요.
힘내요.
책도 못읽고 사는데 오늘 잠시 책장을 넘기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있어서 보내요.
"죽음은 단단하고, 획일적이고, 불변적이다.
그것은 또한 크고, 사납고, 시끄럽고, 그리고 매우 거만하다. 크와 미사일이 자랑스럽게 과시하며 앞장서고, 훈력된 군복 입은 군인들이 뒤를 따르는 군사행진은 죽음의 세력의 전형적인 표징이다.
그러나 생명은 다르다. 생명은 매우 취약하다.
생명이 첫 번째로 보여질 때 보호가 필요하다-식물은 꽃을 천천히 피우고, 새는 그 둥지를 떠나려 하고, 작은 아기는 소리를 낸다.
그것은 매우 작고, 매우 숨겨져 있고, 매우 부서지기 쉽다.
생명은 자신을 가장 두드러진 자리로 밀어 넣지 않는다. 그
것은 숨겨진 채 있기를 바라고 주주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생명은 부드럽게 전달된다.
생명의 소리는 조용히 나와 종종 그 소리가 침묵의 한 부분으로 들리는 것 같다.
생명은 온화하게 움직인다. 빠르지 않고, 활기찬 발걸음이지만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보이지 않는다.
생명은 부드럽게 만져진다. "
기범씨는 생명이에요.
언제까지나 생명 편에 서있을 거죠?
생명은 약하고, 여리고, 부드럽고, 드러나지 않는 거래요.
끊기지 않고, 멈추지 않죠.
기범씨에게, 이라크 사람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건강하게, 기쁘게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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