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5월 15일 서울역 시위가 사그러들지만 않았어도...
23년전 5월의 함성과 절규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79년 10.26사태로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봄이 올 것을 기대했었다.
10월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을 꿈꾸던 박정희는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에 밀려 정권유지가 어렵게 되자 긴급조치라는 해괴망칙한 법을 휘두르며 민주운동을 탄압했었다.
79년 긴급조치 9호의 위력은 대단하여 유인물 한장만 긁어도 구속되고 술집에서 술을 억다 박정희 욕을 하면 구속되는 시절이었다. 소위 국가원수 모독죄,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함께 청년운동을 했던 한 선배는 당시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렸던 목요 기도회에서 박정희 독재 정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3개월간 수용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각성한 민중들에 의해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이런 상황은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비화 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민주화 요구의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범 민주세력은 이제 이 땅에도 민주주의의 봄이 올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전두환을 필두로하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산산조각나게 된다.
힘없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을 위협하여 군, 민의 수사권을 빼앗으며 합동수사본부장이 된 전두환은 구테타 계획을 착실하게 진행한다.
당시의 민주세력은 이런 낌새를 눈치채고 11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선거 반대 범국민 궐기대회를서울YWCA 강당에서 열었다. 당시 언론은 이 집회를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라고 불렀다.
함석헌, 계훈제, 문익환 선생을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가 이사건으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필자도 이사건과 관련되어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의 신세를 졌다.당시 합수부는 잡혀간 민주 인사들에 대해 아주 가혹한 고문을 가했고,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사건을 짜 맞추었다.
필자는 사건 발생후 10여일간을 도망다니다 체포되었는데, 거의 수사가 마무리 되는 시점이었다. 합수부에 최후까지 남은 이들은 나를 포함해서 10명이었다. 그중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인 현기영선생도 있었다. 현기영선생은 잡혀온지 꽤 되었는데 매일 심한구타와 고문을 당해 온 몸이 모두 멍자국이었다. 최후까지 남은 몇 명은 20일씩의 구류를 받고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나는 남부 경찰서에서 12. 12사태를 맞았다.
12. 12 구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심 수습에 나섰지만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이듬해 신학기가 되면서 대학가는 들끓기 시작했다.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비상계엄 아래지만 시위는 그칠줄 몰랐고 대학교에는 휴교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쟁취하려는 학생들은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5월을 맞아 크고 작은 시위는 5월 15일 서울역 시위로 절정을 이루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는 오전9시경 전국신학대학 학생회협의회 소속 신학대학생들의 도착으로 시작되었다. 7개 신학대학 소속 학생 1,500여명은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 교회에서 집결하여 스크럼을 짜고 서대문로타리를 돌아 서울역에 도착했다. 이후 서울역에는 각 대학의 시위대들이 속속 집결했다.
한 1만명정도가 모이자 시위대는 스크럼을 짠채 남대문 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선두는 신학대학생들이 맡았다. 왼쪽 선두는 감리교신학대학생들이 오른쪽 선두는 한국신학대학생들이 섰다.
시청 앞까지는 방해 받지 않고 진출했으나 광화문쪽으로 더 진행하자 시위진압 경찰과 군대가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은 보도블럭을 깨 맞섰고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오후에 들어 시위대와 진압군은 남대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를 계속했다.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한 시위대는 화염병을 만들기 시작했고 화염병의 효력은 대단하여 진압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렇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해는 어느덧 저물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격렬한 시위로 양측의 피해도 컸다.
시위를 진두 지휘했던 학생지도부들은 이 시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을 의논했는데,잠시 관망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학생회 간부의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 국회의원이 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군부를 너무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잠시 관망하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밤 11시경 시위대는 자진해산하기에 이르렀다.
25시간 후,비상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고 5.18의 서곡이 열렸다. 필자는 5월 15일 시위가 사그러 들지 않고 한 3일만 더 계속 했더라면 광주만큼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민주화의 봄을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의 서슬퍼런 신군부의 위세 앞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이 땅은 10여년을 퇴보하고 말았다.
그해 광주는 필자에게 많은 아픔을 안겨주었다. 함께 감리교청년운동 ,기독청년 운동을 하던 절친한 친구 김의기 열사가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하였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 100여장을 남기고 젊디젊은 민주투사는 계엄군의 탱크위에서 산화해 갔다.
언론은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북한의 사주를 받는 폭동이라고 왜곡했고, 신군부는 강경진압 방침을 거듭했다. 수많은 동포들이 공수부대의 총, 칼에 죽어가는데도 언론은 보도지침에 따라 앵무새처럼 신군부의 입이되고 있었다.
그해는 참 슬픈 한해였다. 지금도 5월이 돌아오면 그 때 슬픔의 기억이아련히 떠오른다.
5월 그날이 다시오면....
<광명시민신문 이승봉기자. 2003.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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