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3월 16일, 이곳 시간 오후 여섯 시.
타흐리 광장에서 최병수 선생님이 작업해 온 걸개를 걸어 놓고 행사를 갖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모여 어울렸습니다. 북을 잡아본지 오래되었지만 나도 북을 들고 신나게 그이들 속에서 놀았습니다. 미스터, 미스터! 굳!
오전에는 카심의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교실 뒤에 한국의 아이들이 보내어준 사진과 그림을 붙였습니다. 아이들이 참 좋아했습니다. 돌아나올 때 한 아이가 공책을 뜯어 '우리도 한국 어린이를 좋아해요' 라고 써 주었습니다. 기뻤습니다.
어제도 오전에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찾았습니다. 아, 어제 15일은 전세계 반전집회가 있던 날이지요? 이라크에서도 곳곳에서 아주 큰 집회가 열렸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는 동원되는 관제 집회였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그리고 각급 직장, 마을 단위로 깃발과 후세인 사진을 들고 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우리는 처음 카심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로 가려 했는데, 그곳 아이들은 집회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학교 학생이 집회에 동원된 것이 아니어서 가까운 다른 학교를 찾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사진, 우리 아이들의 그림을 그곳 아이들 복도에 붙였습니다. 아이들은 우리를 크게 환영해주었습니다.
오후에는 거리로 나가 이라크 시민들이 하는 관제 집회를 보았습니다. 그 안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팀원들 간에 의견은 여럿이었지만 내 생각에 그 집회에 참여하게 된다면 우리의 반전의지가 후세인을 지지하는 뜻으로 왜곡, 선전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저께는 먼저 유엔 본부 앞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어린이와 평화'와 바끼통 이름으로 손수 만들어준 걸개와 기차길옆 공부방에서 아이들이 그려준 걸개를 걸었습니다. 나머지 걸개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학교나 마을에서 걸어야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유엔 본부는 시내 외곽에 있어 사람들이 잘 다니는 곳은 아닙니다. 관계자나 기자들은 다니겠지요. 그곳, 유엔 본부 건물은 우뚝 서 있고, 그 앞은 황량했습니다. 건너편 철망 벽에 우리가 걸어놓은 걸개가 웃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에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펄럭이며 걸려 있습니다.
오후에는 올드 바그다드 거리에 갔습니다. 서민 마을, 아이들이 많은 곳.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골목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기억해주었어요. 아이들이 우리 손을 잡고 따라다녔습니다. 골목을 다니다 어느 집 앞에서 한 여인이 집에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알리와 자라, 모하메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혹은 천국의 아이들에서 보던 그런 집안 모습이었습니다.
전날은 또 무엇을 했더라? 이곳에 도착한 날이었지요. 아, 이곳은 그 날 모든 도시가 죽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맘'이라는 사람의 추모일이라고 하는데, 이 날은 시내의 상가도 모두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모두 집안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없었어요. 정말 죽어 있는 도시, 그랬습니다. 아, 이 날이 우리 재입국 2진이 바그다드로 들어온 첫날이었군요. 우리는 이라크인과 어울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시피 했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준비해 보내온 여러 단위의 걸개를 들고 나가 사람 없는 타흐리 광장을 뱅 두르며 걸었습니다. 드문드문 시내에 나온 사람들이 함께 했고, 군인 경찰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번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들리던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라는 장애어린이 집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안았습니다. 움직임조차 자유롭지 못한 아이들과 얼굴을 대었습니다.
이 정도가 그간 재입국 뒤에 보낸 우리의 일정입니다. 일지를 열심히 쓰려고 했지만 시간이 모자라 첫날부터 밀리기만 했습니다. 카심과 비밀경찰을 동행한 채, 하루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다음 활동을 준비하느라 새벽 늦게까지 준비하다 다음 아침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형편이었습니다. 두꺼운 종이를 사다 한국에서 보내온 아이들 사진을 하나하나 붙여 전시물을 만들고, 아이들 그림, 엽서 역시 그렇게 전시물을 만들었습니다. 그 일을 할 때마다 아는 이의 이름이나 얼굴이 나오면 마음이 따뜻해져 힘이 나곤 했어요.
너무 빡빡한 일정이 계속되면서, 그리고 몸이 먼저 지치면서 이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만 오전 일정을 준비하게 되고, 오후 일정을 찾게 되고 무언가에 마음이 쫓기는 것 같았습니다. 왜 이래야 하나, 생각해보니 그건 관광 비자라는 것으로 들어왔기 때문, 그리고 그룹 비자라는 형식일 수밖에 없는 한계 때문이었나 봅니다.
관광 비자 - 그룹 비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 끝까지 남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룹 비자는 출국을 할 때도 입국하던 때 사람이 다 같이 나가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비자의 그룹 가운데 한 명이라도 이 땅을 뜨고 싶다 하면 나는 할 수 없이 같이 나가주어야 합니다. 내가 끝까지 있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험한 상황에 놓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그래서. 언젠가는 나가야할 거라는 생각에 쫓기는 마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무언가를 하고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
그저 나는 충분히 자고, 거리를 걷다가, 만나는 이라크인이 있으면 할 수 있는 만큼 이야기를 나누고, 여느 골목이나 공터에서 아이들과 놀고, 때로는 숙소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그대로 이 땅 전쟁을 맞고 싶은 건데.....
내 생각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그 날 재입국 1진이 떠날 때 나는 암만에 남게 되면서 다시 이라크로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 가장 답답했습니다. 암만에 남은 다른 이들이야 애초부터 다른 비자 신청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확실하게 1진 비자가 나왔기에 또다른 비자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방법으로 신청한 다른 사람들의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서, 그래도 꼭 이라크로 들어오고픈 사람들이 그룹 비자 요건을 갖추어 관광 비자를 냈습니다. 그 비자는 한계가 명확했지만 그렇게라도 이라크에 들어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온 지 이틀 째 되던 날, 내가 끼었던 1진의 비자가 단체 비자이기는 하지만 좀 특별하게 받은 거라, 그것을 복사해서 다들 따로 한 장씩 가지고 있으면 개인으로 입출국이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진작 알았으면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을 텐데, 그랬으면 그룹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느라 억지로 함께 나가는 일은 없을 텐데, 지금처럼 관광 일정에 매달린 채 그 안에서 틈을 내어 무슨 활동을 꼭 해야한다는 압박 같은 건 없었을텐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그리고 상정한 유엔 결의안 심의 날짜가 다가올수록 언제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해야 했습니다. 아, 진작 그 비자로 들어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일단 개전 전에 이라크를 나가겠다는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그이를 위해 우리는 모두 나가야 했습니다.
나는 다시 들어올 생각이었습니다. 관광비자 그룹이 출국하려면 일단 나도 나가야 하는 거고, 그렇게 나가면 암만까지 갔다가 오는 거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국경에서 출국 수속 뒤 바로 입국 수속을 거쳐 바그다드로 돌아와야지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지를 확실히 알아봐달라고 카심 씨에게 부탁해두었습니다.
관광비자로 들어온 사람들은 어제 회의를 하며 일단 17일까지 있자고 했습니다. 어제까지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고, 게다가 16일(오늘)의 걸개 거는 행사와 17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집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제야 안 사실인데 11일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본인 스님 네 분이 PEACE MARCH 라는 행진을 계속 해왔다 합니다. 바그다드에서 140키로 떨어진 곳부터 17일까지.... 그래서 개전설이 나고 있는 17일 저녁 폭격이 예상되는 프레스센터 앞 티그리스 강 다리에서 촛불과 랜턴을 들고 시위를 하기로 말입니다. 그 날은 바그다드에 와 있는 모든 평화활동가들이 모여 하기로 했습니다. 17일은 이곳 달이 가장 밝은 밤이기도 합니다. 부시의 17일 공습 계획도 아마 그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어찌했건 어제까지 떠도는 정보는 전쟁이 늦추어질 거라는 거였습니다. 영국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 부시의 아버지가 유엔 동의안이 없으면 전쟁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몇몇 나라에서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론이 미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게다가 이라크 현지인들이 체감하는 공포도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해서 우리는 목숨을 각오한 이건, 아니면 개전 전까지를 계획한 이건 17일 촛불 시위까지 함께 해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17일 일이 있을 것 같다, 기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에서 단독으로 행동할 것을 선언했다, 17일 후에는 경고나 예고 없이 아무 때나 개시하겠다...... 글쎄요, 이런 위기감은 그 동안에도 몇 차례 떠돌다가 잠잠해졌기에 약간 긴장은 되었지만 크게 휘둘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전 카심이 그래요. '암만으로 돌아가려면 어서 국경 택시를 예약해라, 그렇지 않으면 차가 모자랄지 모른다, 나는 두렵지 않지만 우리 식구가 걱정이다.' 카심이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한 건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기는 이상했습니다.
타흐리 광장에서 최병수 선생님이 준비한 걸개 작업을 준비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여러 기자나 평화활동가들이 오가면서 많은 정보가 오갔다. 정보는 그것, 지금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위급하다. 전쟁이 확실시되는 것 같다......
우리 팀 사람들도 둘만 마주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거나 얘기했습니다. 너는 어떻게 할 텐지, 그 쪽 그룹은 어떻게 할 것인지. 나는 우리 그룹이 나가야 해서 나도 나가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1진 비자 복사본을 가지고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최혁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1진에 이름이 오른 일곱 명의 비자라는 것이 개별로 입출국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러려면 복사본에 당국의 무슨 도장을 받아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당국의 확인이 다시 필요하다고? 그러고 보면 그 복사본 비자로 내가 다시 들어올 수 있는지 또한 불확실했습니다. 개별로 입출국을 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당국의 확인이라는 또다른 절차가 있는지는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암만으로 나갔을 때 가능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지금은 그런 상태입니다.
오늘 저녁 모두 모여 회의를 하기로 했습니다. 누가 돌아갈 것인지, 언제 돌아갈 것인지, 어느 그룹이 돌아갈 것인지. 지금까지 개인으로 만나 나눈 이야기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있기로 한 한상진 선생님과 상현 씨, 은아 씨가 그리할 것 같고, 2주정도 더 머물거라 얘기한 주재일 기자가 돌아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종진 기자 또한 더 남아 취재를 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1진 가운데 최병수, 최혁, 임영신 선생님들은 내일 귀국할 것을 준비한다고 했고, 관광비자로 들어온 우리 그룹 또한 내일 돌아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다시 들어오는 비자가 가능하다면 다시 들어올 생각입니다. 회의를 하면서 개인마다 입장이 어떻게 바뀔지, 그룹이나 전체의 계획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타흐리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내가 북을 쳐서 그런지 구경하던 이라크 인들이 다른 때보다 더 아는 척을 많이 해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몇이 내게 물어요. 언제까지 있을 거냐? 오늘 코리아로 돌아갈 거냐? 내일도 있을 거냐? 나는 이곳에서 당신과 머물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제서야 그것을 물은 사람이 두 손을 모으거나 엄지를 치켜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외국인이 있다는 게 그이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기 때문이라지요. 오늘따라, 그것을 묻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하이달과 둘이 있었습니다. 우리 팀원들 모두가 하이달을 좋아하고, 나도 하이달을 무척 좋아해요. 하이달 또한 나를 참 좋아합니다. 재입국 첫날, 하이달에게 무섭지 않느냐 물었을 때 하이달은 무섭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마 전쟁이 나더라도 한 달 뒤에나 날 것 같다며 부드러운 얼굴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와 단 둘이 있을 때 하이달이 아주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금 이곳은 매우 데인져리스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암만으로 가라고, 꼭 내일 암만으로 가라고. 나는 가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하이달,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처음에는 그저 내 마음을 이야기하다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투어리스트 비자로 왔기 때문에 우리 그룹이 암만으로 간다면 나도 가야한다. 하지만 다시 들어올 것이다..... 플리이스, 플리이스. 하이달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였습니다. '제발, 제발 암만으로 돌아가. 그리고 다시 들어오지 마, 이곳은 위급한 상황이야.'
나는 다시 들어오겠다고 했습니다. 하이달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Why?라고 물었습니다. 비코오즈 우리는 친구니까, 위아 프랜드. 사디끄. 하이달은 '친구'라는 우리말을 배웠고, 나는 '사디끄'라는 이 나라 말을 알았습니다. '오오, 친구? 예. 땡큐. 벗 유 머스트 고 투 암만, 플리스' 하이달이 나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깊어지는 그이의 눈과 떨리는 목소리로 알 수 있었습니다. 플리이스, 플리이스 포 미, please for me, ok?, please for me, ok? 하고 두손을 모으는 하이달 앞에서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하이달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우리가 함께 찍은 디지털 카메라 사진을 보며 내 웃음이 아름답다 했고, 함께 찍은 사진을 바로 뽑아달라며 그 사진기를 들고 사진관 몇 군데를 같이 돌았습니다. 그 사진을 꼭 갖고 싶다고, 우리는 친구라고......
그 사람 많은 광장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이달이 나를 위로하는 말. 자기도 나갈 테니, 나도 꼭 나가라고..... 아니, 하이달은 나갈 수 없습니다. 나가지 않아요.
숙소에 돌아오는 길. 주유소를 보니 자동차가 줄을 이었습니다. 기름 넣는 곳마다 차가 끝없이 서 있어요. 어제까지는 그런 모습 없었습니다. 지금 전쟁을 체감하는 것은 당장 눈 앞의 일. 사람들은 모두 자동차에 기름을 채워넣느라 바쁩니다.
숙소에 돌아왔습니다. 이곳에 와서는 인터넷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팔레스타인 호텔 피씨방에 잠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뉴스를 살펴봐야겠어요. 그런데 지금 카심에게 전화가 왔는데 국경 택시가 400달라로 뛰었다고 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100달라였거든요. 어서 예약해라, 안 그러면 한정없이 뛸 거다. 전쟁이 터지면 만 달라까지 뛸지 모른다.....
전쟁을 준비하는 건 그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없는 사람들, 거리의 아이들은 여전히 아랑곳없이 광장에 나와 있고, 뛰어놀고 있습니다. 노라와 낸씨, 오마르가 있는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도 그럴 것이고, 올드 바그다드의 아이들도 그럴 것이고, 국경 택시 정류장 앞 모하메드네 식구도 그러겠지요. 아 물론 우리의 친구 카심과 하이달 또한 마음으로만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각급 호텔이나 고층 건물에는 테이프로 가위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폭격 내지는 충격에 유리창이 깨질 때 그것을 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직접 맞는 폭격 말고 유리 파편 따위에 맞아 죽는 이들이 더 많다고 하던가요?
전에는 아마 마음 속에, 누군가 나를 설득해주기를, 혹은 상황이 나를 바깥으로 보내기를 하고 바라는 약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이라크 바깥으로 나가게 되는 까닭을 어쩔 수 없는 설득이나 상황으로 삼아 위안을 받고 싶어 그랬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 없어요.
전에는 내가 이 전쟁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이곳에 있는 것,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것일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화하는 것, 마지막일지 모르는 순간 누군가 손을 잡고 있는 것.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아요. 일어나지 않아요.
일어나지 않습니다.
2003. 3. 16
박기범(이라크 반전 평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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