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한 행진, 전운이 감도는 바그다드
어제 첫날, 우리가 들은 것과 다르게 정부 요원이나 가이드의 통제는 심하지 않았다. 정부요원들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 팀이 하고자 하는 뜻이나 내용을 알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은 탓일까?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엄격하게 규제하고, 심지어는 그 각도까지 제어 받을 거라 했지만 어제 하루 우리는 아주 자유로웠다. 심지어는 사담 후세인의 동상 사진을 찍어도 아무 말이 없었다. 운이 좋아서 좀 더 편한 요원들을 만난 건지 어떤 건지, 아무튼 무척 다행스럽고 잘 된 일이었다. 오히려 우리 팀원들이 먼저 의아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긴장을 너무 놓은 탓이었을까? 우리는 오늘 있을 휴먼쉴드 집회 합류를 위해 몇 사람이 따로 남아 피켓을 만들기로 했다. 요원들이 왜 사람 수가 모자라는가를 물으면 그이들은 몸이 좋지 않아서 호텔에서 쉬면 좋겠다는 대답을 준비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요원들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가이드도 무척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뿔싸! 우리는 어쩌면 앞으로 더 엄격한 통제와 감시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들어온 우리에게까지, 자국민과 생사를 함께 하겠다고 들어온 우리에게까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후세인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통제와 감시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기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오후의 거리 행진에도 참여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다행히 요원들이 그것을 막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만든 피켓과 깃발을 들고 휴먼쉴드가 묶는 숙소 앞으로 떠났다. 승로는 얼굴에 물감으로 peace 라는 글자를 넣어 그림을 그렸고, 짧은 스포츠 머리 바탕에 아예 NO WAR 라는 글자를 새겨온 은국이는 그것이 더 눈에 띄도록 물감색을 칠했다.
티그리스 강을 가로놓인 다리를 건넜다. 다리 난간에는 어제 보지 못한 플랭카드 몇이 눈에 띄었다. 다리를 건너자 곧 휴먼쉴드 숙소가 나왔고, peace라는 글자를 그려 넣은 자동차를 보았다. 어제, 우리끼리 시내를 다니며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작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직 사람들이 모여든 자리에 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겨우 자동차 한 대를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머나먼 곳, 철저하게 폐쇄되고 통제된 나라, 그리고 언제 폭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공포의 땅에서 우리와 한 마음으로 찾아와 있는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있다는 흔적을 보았을 뿐인데도 말이다.
원래 약속한 시간은 세 시, 우리가 그 앞에 닿은 건 세 시 삼십 분.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 길을 따라가면 곧 만날 수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오 분, 십 분. 길이 막혔다. 아, 바로 요 앞이구나. 차를 돌려 골목을 돌아 나오니 바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 보였다. 나이가 많은 노인부터 어린아이를 목에 태우고 있는 사람까지, 그리고 살빛이 검은 사람부터 하얀 사람까지 나이나 성별, 옷차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떼를 이루어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팔을 흔들기도 했고, 작은 종이에 구호를 적어 나오기도 했고, 여기저기에서 누군가 앞서 소리를 외치면 자유롭게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팀 또한 행렬의 가운데로 섞여 들어갔다. 무리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손짓을 하며 우리를 환영했다. 깃발을 펴고, 피켓을 들어 우리도 나란히 한 줄을 이루었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집회나 행진 같은 것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기에 무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어수선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너무 준비가 모자라지 않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살짝 주눅드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 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이 대열 가운데로 들어가자 많은 외국의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우리 앞에 모여들었다.
다소 분주한 마음으로 우리는 일단 발을 맞추어 나란히 대열을 따라 걸었다. 멀리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선창하는 구호에 입을 맞추어 따라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따로 크게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대열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다. 인도에는 많은 이라크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들어 보이거나 저희들 말로 무어라 말을 건넸다. 어제 거리에서 본 앵벌이 아이들을 닮은 아이들이 행진 대열에 들어와 그 사이를 뛰어다녔고, 우리 둘레를 쫓으며 함께 손을 흔들었다.
어느 정도 대열 합류에 적응이 되어 앞뒤를 둘러보니 우리처럼 팀을 이루어 움직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로서는 시간에 쫓긴다고 급하게 준비한 피켓과 깃발인데 사람들 눈에는 크게 띄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머리에 글자를 새긴 은국이와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한 승로까지 …….
어느 새 행진을 하는 무리 가운데에서 우리는 가장 주목받는 열이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쌌고, 두터운 연대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냈다. 가슴이 벅찼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눈길을 받는다 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이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실로 의미 있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우리의 작은 의지, 그것을 이 땅에 모인 온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설렘, 흥분, 가슴 벅참. 우리 줄 왼편에서 걷던 허혜경 씨가 목청을 돋아 물었다. "What do you want?" 우리는 대답했다. "Peace!!" 허혜경 씨가 다시 물었다. "When do you want it?" 이번에는 우리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Now!!"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그 평화는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호였다. 우리의 외침, 우리가 이곳에 온 까닭이었다. 허혜경 씨의 질문이 되풀이 될수록 대답하는 사람들의 대답 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이번에는 선창하는 사람이 "No"라고 외쳤고, 나머지 사람들은 주저 없이 "War"라 대답했다. 누군가 다시 "Yes"라고 외치면 우리는 "Peace"라 대답했다. 피쓰, 피쓰, 피쓰!!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이 아플 만큼 부신 하늘에 대고 그것을 외치는 일 뿐이었다.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르는 저 눈부신 하늘에 대고.
시위 대열의 행진은 타흐리 광장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는 곧 모든 참가자들이 광장을 둘러 한 줄로 늘어섰고, 그 행렬은 하나의 인간 띠가 되었다. 저마다 다른 얼굴빛, 다른 옷차림,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긴 띠를 만들며 섰다. 저마다 가지고 나온 피켓이나 깃발, 플랭카드들을 허리춤에 둘렀다. 거기에는 외국에서 온 평화활동가들 뿐 아니라 우리를 환영해주는 바그다드 시민들까지 함께 모여들었다. 그리고 신기한 듯, 재미있는 듯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얼굴을 내미는 개구쟁이 아이들. 띠를 이룬 대열 곳곳에서 앞에 나선 사람들이 입모아 외칠 구호를 말했고, 우리는 한 목소리로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을 외쳤다.
나 또한 내 곁에 와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돈 어택 이라키 칠드런!!을 외쳤다. 살갗이 검은 사람, 흰 사람,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피쓰와 노워를 외쳤다.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서양의 할아버지 한 분은 기타를 들고 나와 평화를 노래했다. 사람들이 그 곁을 둘러싸고 함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했다. 우리는 평화를 원했다. 우리 개개인은 비록 아주 작은 힘조차 없을지 모르지만 용기를 내어 이 땅을 찾아왔고, 목숨을 내거는 마음으로 호소했다. 부디, 제발 이 작고 가난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말라고, 이 해맑은 눈동자의 아이들을 한순간 잿더미 아래 죽어가게 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는 모두가 친구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눈이 맞으면 누구라도 반갑고 고마웠다.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은 되는 만큼이라도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눈빛으로라도 한 마음을 나누었다. 자연스레 집회를 정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취재했고, 서로가 서로를 카메라에 담았다. 알려야 한다,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고향 나라에서는 이 곳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낱낱이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얼마나 소박하며 마을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이 땅에 일어나게 될 전쟁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 것인지.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평화활동가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 모여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들을 어서 본국으로 알려내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해야 한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아무래도 일어날 것만 같은 이 땅의 전쟁이 무엇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똑똑히 기록해야 한다.
사람들은 서로 바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두려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장면을 지켜두려고 바쁘게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애초부터 하나였던 마음들을 다시금 다지고 새로이 가꾸었다. 더러는 흥분하여 말을 토했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이 세상 너머에서나 지을 것 같은 웃음을 얼굴에 지었다.
광장 한쪽에서 그렇게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한국에서도 오늘 반전평화집회가 있었겠구나하고 떠올랐다. 어땠을까, 사람들은 많이 모였을까? 현식이 형이랑 성규가 고생이 많겠네. 겨레아동문학회와 기차길옆 공부방 선생님들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까지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으면 참 좋겠는데. 한국에서 애쓰는 분들 모습 떠올리니 미덥고 든든하다. 여기 바그다드로 들어와서는 소식 한 번 제대로 띄우지 못했는데……. 보고 싶다.
사람들이 뒤섞여 바삐 움직이는 사이, 나는 광장 분수대 아랫편에 있는 잔디밭으로 뛰어 내려갔다. 사람들이 띠를 이루며 서 있을 때 내 둘레에 와 까불던 아이 둘이 그 아래에 있었다. 두 아이는 바람이 삼분의 일쯤 빠진 축구공을 가지고 공을 찼다. 둘 다 맨발. 발등이 아주 거북 등 처럼 갈라져 있는 아이들이다. 한 아이가 공을 차 넣으면 한 아이가 공을 막았다. "헤이!", "헤이, 보이!"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손을 높이 들고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
패스, 패스 미 더 볼." 아이가 공을 차 주었고, 나도 그 공을 받아 다시 아이에게 찼다. 셋이서 멀찍이 떨어져 차고, 받고, 뛰어다녔다. 그러더니 한 녀석 제 자리에서 뛰어 올라 머리로 받는 시늉을 하면서 그리고 공을 띄워 달라한다. 까부는 모습이 아주 귀엽다. 멀리서 공을 띄워 올려주면 쫓아가 머리로 받고, 다시 띄워 올리면 머리로 받고. 한 번 더, 한 번 더, 원쓰 모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나던 이라크 청년들도 끼어 들더니 자기에게 패스 좀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차고 받고 달리고, 다시 차고 받고 달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더니 한 순간 광장에 모였던 아이들이 떼로 달려왔다. 아마 그 때까지 광장 위에서 외국인들이 벌인 행사에 눈이 팔려 그 둘레를 서성이던 아이들이 그제서야 잔디밭을 보고 우르르 내려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아이 녀석들이 수십 명 들러붙으니 정신이 없었다. 공을 몰고 달리는 대로 수십 명 아이들이 우르르 쏠리곤 했다. 여기 저기에서 헤이, 미스터! 하고 나에게 손짓했다. 행복했다. 기껏해야 삼십 분 남짓이었지만 그 때처럼 즐겁게 공을 차 본 기억이 없다. 나는 더 신이 나서 숨이 차는 줄도 모르고 공을 찼고, 그럴수록 아이들은 함께 신이 나 함께 달렸다. 잔디밭 위를 구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드는 아이가 있었다. 그렇게 삼십 분쯤 뛰었을까? 어느 새 우리 팀을 감시하는 정부 요원이 쫓아 내려와 그만 하라고 말렸다. 그만 숙소로 돌아 가야할 시간. 정부 요원들과 광장으로 올라서 버스를 가는 길까지 아이들은 떠나지 않고 계속 쫓아왔다.
아니 아이 뿐 아니라 청년과 나이 많은 아저씨도 있었다. 그러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내게 하는 말이 "유 아 마라도나, 유 아 까를로스". 어느 새 그 무리에서 내 이름이 마라도나와 까를로스가 되었다. 사실 나는 축구 같은 운동을 잘 할 줄 모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저 신이 나서 뛰어다녔더니, 못해도 창피할 것 없이 뻥뻥 차고 했더니 이곳 사람들에게는 그리 보인 모양이었다. 하긴 나중에 광장으로 올라오는 길에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광장으로, 버스가 있는 길로 갈 때까지 나를 둘러싸는 십 여명의 아이들, 사람들. 아이들은 나하고 눈을 맞추려고 자리에서 뛰어올랐고, 팔과 허리에 매달렸다. 마치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광장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버스에 올라타기가 싫었다. 그 곳에서 아이들하고 해가 지도록 축구만 했으면, 배가 고파 쓰러질 때까지 그렇게 뛰어다녔으면……. 그런데 내가 오늘 아이들과 뛰어 놀던 잔디밭 또한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까처럼 아이들이 그렇게 뛰어 노는 머리 위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다. 도무지 거짓말 같기만 한, 너무너무 끔찍한…….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난 뒤, 신부님은 어제 들었던 강경남 기자의 이야기를 한 층 더 현실감 있게 느끼시는 모양이었다. 오늘 집회, 온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인 마음만 생각하면 더 없이 마음 벅차지만 실은 놀란 부분도 있었다. 백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 이것뿐인가? 과연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 외국인, 평화활동가로 들어와 있는 외국인이 이것뿐인가? 언젠가 은국이에게 들은 얘기가 처음 IPT에서 목표한 것이 10만 명이라 했다. 평화지킴이로 들어온 온 나라의 사람이 10만 명만 된다면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계획이다. 그런데 백 명도 채 되지 않다니.
'전쟁은 임박해 있다, 3월 7일 개전설이 확실한 것 같다, 아까 나온 취재진을 보아도 왠만한 곳은 다 빠져나갔고 얼마 남지 않았다, 기자들이 빠져나갔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이다, 평화활동가들도 상당수 빠져나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개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미국에서 조작하고 부추겨 준비하는 반 후세인 세력의 폭동이다, 폭동이 일어나면 그 혼란상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폭도들에게 가장 큰 타겟은 바로 외국인이다, 우리가 본 시내의 모습은 이 나라 실상의 일 부분도 안 된다, 바그다드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엄청난 빈민굴이 있다, 그 곳에서는 벌써 호롱불을 준비하고 식량을 재워 놓으며 전쟁 준비를 다 하고 있다……'고 하는 이곳 소식통의 말을 빌은 신부님의 걱정.
애초 A팀이 3월 5일에 빠져나가고, B팀은 3월 중순 개전이 임박해 올 때 나가자던 계획에 비추면 상황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그와 동시에 몇 사람은 암묵적으로 개인적 결단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숙소에 들어와 나름대로 휴식을 취하며 맥주를 사다 마시며 가볍게 웃고 떠들기도 했지만 서로들 보이지 않게 동요를 하고 있다. 차마 꺼낼 수 없는 이야기, 꺼내기 힘든 이야기. 아무래도 며칠 안에 우리 모두는 또 한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정리가 되든,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든.
저녁에 바깥에 나갔다 온 팀원 몇이 호텔에서 결혼식 하는 걸 보았다 이야기해주었다. 사람들이 전통 춤을 추었다 했고, 그 가운데 꼬마 아이들이 춤추는 모습은 우리 나라 애들하고 아주 똑같다며 무척 귀엽다 했다. 그리고 그 말끝에 누군가 한 마디를 더 보태었다. 요즘 이 나라에 결혼식이 무척 많대요, 그게 아마 전쟁이 다가오니까 다들 서둘러 결혼이라도 하는 거겠죠…….
**바그다드에서 만소우 호텔에 묵다가 속소를 옮겼습니다.
이곳은 '자핫 알카리즈'라는 곳이고,
숙소의 전화번호는 001-9641-717-2639 (107호)입니다.
또는 001-9641-718-3085 (107호)입니다.
(텍스트 완성형으로 저장하다 보니까 띄워쓰기나 줄바꾸기가 아무데서나 깨지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사이 사이 저장했다가 다시 열어보고 하면 깨져 있던데, 다시 정돈해서 저장하더라도 또 열어보면 깨져 있곤 합니다. 게시판에 올릴 때는 조금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2003년 3월 3일 04시 41분입니다. 일지가 또 하루 밀렸어요. 다른 팀원들은 새벽까지 토론을 나누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저도 이제 그만 자야지요.)
2003. 3. 1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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