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통신> 평화로운 도시, 거짓말 같은 전쟁-이라크 첫날
이라크통신> 평화로운 도시, 거짓말 같은 전쟁-이라크 첫날
  • 박기범
  • 승인 2003.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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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도시, 거짓말 같은 전쟁-이라크 첫날

이라크에서의 첫날밤. 여기에 오니 믿기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땅에 우리는 왜 그렇게 들어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던가. 이토록 평화로워 보이는 땅에 정말 미사일 폭격이 일어나기나 할까?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정리 회의를 할 때 한겨레 임기자님이 몇 가지 정보를 얻어와 알려주었다. 우리가 들어 예상하고 있던 개전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질 것 같다는 것. 이곳에서는 3월 7일 이후로 위험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3월 중순 정보와는 다르다. 그 근거로 중순 이후에는 40˚C 이상 날씨가 되고 모래 폭풍이 몰아쳐 오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전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 밖의 보이지 않는 정보들로 하여 각국의 기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웬만하여 기자들은 2주 이상 여유를 두고 나가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현재는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거의 모든 기자들이 빠져나갔고 이라크내의 자국민이 있는지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 개전이 되면 이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이 날 거라 예상하는데 길어야 2주 정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사일이 1분에 3000두를 발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며, 지금은 이곳 호텔이나 대사관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는 이미 전쟁 이후를 다 준비해 놓고 있는데, 폭격이 쏟아지는 아수라장 속에 미국이 미리 준비해놓은 조작으로 반후세인 세력의 폭동이 예기된다. 게다가 지금은 경찰이나 국인 뿐 아니라 민간인도 총기를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폭동이 나면 아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랬을 때 폭동 세력의 가장 큰 목표는 대사관이나 외국인이 되기 때문에 호텔이나 대사관 할 것 없이 모두 위험한 상태이다.

정리 회의를 하며 처음 꺼낸 이야기는 이라크에 첫 발을 밟으며 얻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의아해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모습이라니, 도무지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라라는 게 믿을 수 없었다. 오히려 며칠 머물었던 요르단에서보다 사람들은 더 친절했고, 더 순박해 보였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반가이 인사를 건네었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도 손을 흔들었다. 시장 골목의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자기 생업에 바빴고, 거리 곳곳과 공터에 보이는 아이들은 해맑은 모습으로 공을 차며 놀았다.


우리는 첫날 현지 적응을 위해 (그리고 관광 비자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짜여진 시내 관광을 했다. 관광 비자를 얻어 들어온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통제를 받아야 한다. 다섯 사람에 가이드 하나와 비밀 경찰 한 사람. 우리가 암만에서 전해 듣기만 해도 이라크에 들어오면 사진 찍는 각도 하나하나까지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고 했다.

혹여나 찍어서는 안 되는 정부 시설 따위를 찍으면 '조용한 초대'(공안 당국의)를 받게 된다고 들었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가진 계획은 일단 가이드와 비밀경찰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면서 그들의 신뢰를 얻어 융통성을 얻어내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시내 구경을 하라면 시내 구경을 해야 하고, 관광지 방문을 하라면 관광지 방문을 해야 했다. 잘못하면 우리는 모두 '조용한 초대'를 받을지 모른다. 이 곳 이라크는 한 해에 10만 명 이상을 처형하는 나라이고, 이 곳 국민들조차 후세인이나 정부를 비판하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라크에 닿아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놓인 나라에 왔다는 것만 해도 그러하며, 또한 우리 곁에는 늘 비밀경찰이 따라붙는다는 것도 그랬다. 그리고 짧게는 닷새, 길게는 열흘, 우리는 암만에 머무는 동안 이 나라의 꽁꽁 막힌 국경을 넘기 위해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암만에서 저녁 여덟 시에 떠나 13시간 30분을 달려왔다. 추운 자동차 안에서 벌벌 떨며 몸을 웅크렸다. 눈을 떠 차에서 내렸을 땐 이미 바그다드. 거짓말처럼 이곳은 따뜻했다. 햇살이 아주 밝게 내리쬐었고 하늘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무어 그깟 날씨 하나 가지고 이리 놀랐을까 싶기도 하지만 바로 국경을 대고 있는 요르단만 해도 폭설의 아주 추운 날씨이던걸 생각하면 따뜻한 날씨마저 어리둥절하게 했다.

정류장에 내려 호텔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 나는 겨우 할 줄 아는 인사 '앗쌀라무알라이꿈'하고 인사를 건네었고, 정류장 일꾼들은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 어서 이라크 시내가 보고 싶어 까치발을 딛고 담장을 내다보니 한 아이가 궁금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다시 '앗쌀라무알라이꿈'. 아이가 웃었고, 우리도 웃었다. 나와 우리 팀 사람들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손을 뻗어 과자를 건네주니 아이가 아주 좋아라 웃는다. 무어라 더 말을 나누고 싶지만 아이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고, 우리 팀 사람들은 아랍어를 잘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궁금한 마음, 무언가 반가운 마음, 그리고 무언가 더 말을 나누며 더 곁에 있고 싶은 마음. 아이의 이름은 마호메드, 열 두 살.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 물으니 바로 정류장 건너편이었다. 손짓을 써가며 들어가 보아도 되냐고 물었고, 아이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이 아버지가 나왔다. 앗쌀라무알라이꿈. 아이 아버지 또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아이의 동생이 아버지를 대문을 빼꼼 열고 내다보았다. 동생의 이름은 니자르, 열 살. 그리고 아이네 어머니나 이모, 고모로 보이는 여인들이 하얀 터번을 둘러쓰고 나왔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우리는 서로 활짝 웃어 보이는 얼굴로 마음을 전했다. 마호메드네 집. 요르단에 머무는 동안에도 무척이나 이곳 사람들이 사는 집을 가보고 싶어했다. 집 안의 구조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엌이나 방의 모습은 어떨까? 마호메드 형제와 아이의 식구들이 모두 환대해 주어 집을 둘러볼 수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실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는 것이 한 집에 짐작되었다. 마루와 부엌, 아이들네 방, 어른들의 침실. 마호메드의 아버지는 침실로 들어가더니 솔담배를 가지고 나와 '있쯔 꼬레'하며 크게 웃었다.

평화롭고 정다운 마호메드의 가족, 내가 이라크에 와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어쩌면 며칠 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모두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이 땅 가난하고 착한 사람들.


첫날 우리는 바그다드 시내를 거닐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관광 코스로 정해진 쇼루주 시장으로 가는 길. 티그리스 강은 그야말로 평온하게 흘렀고, 다리를 건너 중심지로 들어서니 흡사 우리나라의 남대문이나 동대문 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가에 물건을 내다 놓고 파는 사람, 자전거로 짐을 싣고 달리는 사람, 조금 한적한 길가가 나오면 아무데서나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모스크 시장에 내려 육교를 건넜다.

우리 나라 여느 곳에서도 흔히 보아오던 것처럼 아이를 안은 여인이 손을 내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낯선 외국인을 보면서 좋아라 따라 다니는 아이들. 나는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모두 눈에 담아 두고 싶어 가만 가만 눈빛을 맞추었다. 그리고 목에 건 사진기로 그 애들 얼굴을 찍었다. 손등 발등에 때가 찌들었지만 눈빛만큼은 호기심에 빛나는 아이들. 함시스, 이만, 사닥, 함제, 재슴, 마하메드, 미나 메이슨, 아길, 아딜, 알리……. 사진기 앞에 붙어서는 아이들을 찍고 나면 꼭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마쓰무카?", 캄 우무루카?" 이가 빠진 아이, 얼굴이 검은 아이, 담배를 팔러 돌아다니는 아이, 그리고 앵벌이를 하는 아이. 나 뿐 아니라 우리 팀원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아이들을 안아주고,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시장을 다 돌아나오려는데 처음 육교에서 만난 아이들 셋이 그 때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에이그, 녀석들. 설마 시장 바닥을 놀이터처럼 노는 아이들인데 집이야 잃어버릴까, 외국인이 신기해서 쫓아다니는 거겠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이들이 무언가를 요구했다. 돈을 달라는 것이구나. 뒤늦게 주어서는 안 되는 건데 싶었지만 그 순간 나도 당황하여 작은 지폐를 하나씩 건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팀원 몇도 그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다 한다.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아 마음에 많이 걸렸다.


쇼루주 시장에서 자동차를 타고 옮겨간 곳은 '올드 바그다드'라는 마을. 어디를 가거나 아이가 없는 곳은 없다. 아이에게 눈길이 먼저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본성일까?

이곳에서 또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건 아이들이다. 좁은 골목으로 이어진 길.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집들. 골목마다 나와 놀고 있는 아이들. 사진기를 가진 팀원들이 아이들 사진을 찍고, 아이들은 너도나도 자기를 찍어달라며 둘러싸고, 그렇게 시작된 행렬이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을 다 빠져 나올 때에는 엄청난 수가되었다. 큰길과 맞닿은 골목 끝은 확 트인 광장. 우리 일행을 쫓아온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다하, 헤르메스, 삐떠, 메스오드, 샤미르, 자하라, 후세인, 야슬, 사라모하메드, 미나, 샤자드, 무스타파, 라일, 제멘, 마나르, 리그데, 시엔, 레힘, 하라, ……. 그 때는 하나하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이루 셀 수도 없을 만큼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 그만 우리 일행은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야 했지만 아이들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넓은 길에 들어서면서 커다란 행렬을 이루었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신이 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우리 또한 신이 났다. 아이들과 한 줄로 손을 잡고, 손뼉을 치기도 하고, 발을 맞추어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떻게 시작했을까? 내가 섞인 무리의 저쪽 건너편에서 아이들이 입을 맞추어 "피스, 피스"를 외쳤다. 최혁 선배가 있고, 다른 팀원들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똑같이 손을 브이자로 들어올리며 "피쓰, 피쓰, 피쓰, 피쓰……". 아주 자연스러운 행진이었다. 아이들은 더욱 신이나 함박 웃는 얼굴로 '피쓰, 피쓰.' 아이들을 선동하지 않았느냐고?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설령 아이들이 '피쓰'라는 영어 단어를 몰라도 그건 중요치 않았다. 평화니 전쟁 반대니 하는 말을 했다 해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한데 어울려 한 목소리로 하나가 되었다는 게 그저 놀랍고 기쁠 나름이었다. 누가 과연 우리의 그 행렬을 보았다면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숙소에 돌아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뜨거웠던 것만큼이나 안타까움이 차오른다. 아까 쇼주루 시장에서 만난 앵벌이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렇고, 이곳 올드 바그다드 마을에서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매달리던 아이들을 생각해도 역시 그렇다. 혹여나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한국전쟁 직후 미군을 따라다니며 기브미 검, 기브미 쬬꼬렛을 외치던 그것과 닮지 않았을까? 혹시 우리는 그 아이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잘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우월감이 배어있지는 않았을까? 고급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주고, 선물로 가지고 간 뺏지를 나누어주고.....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티없는 웃음이 떠오를수록 더욱 마음이 조이는 것 같다.)


바그다드에 짐을 푼 첫날, 우리는 많은 이라크 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을 보았다. 무척이나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들, 반기는 얼굴과 정감 있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들. 설령 이라크 정권이 용서받지 못할 압제를 한다 해도, 그리고 사실 후세인 정권이 끔찍한 독재를 저지르고 있지만, 그 누구도 평화로이 살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을 마음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해맑게 웃는 이 땅의 아이들을 전쟁의 포화 아래 죽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 내가 둘러본 이 평화로운 도시에 일 분에 삼천 개나 되는 미사일을 쏘아댄다고? 오늘 우리를 그토록 편안하게 맞이해 준 이 도시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두 피흘리게 만든다고? 그리고 우리가 탄 자동차를 끝까지 둘러싸며 함께 하고 싶어하던 그 아이들마저 한 순간에 죽음으로 몰아넣는다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나라, 이 도시가 며칠 후면 잿더미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어느 나라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땅인데. 그렇기에 억지로라도 전쟁 상황을 그려보면 더욱 끔찍하고 두렵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 휴먼실드 (국제평화단체) 숙소에 들러 앞으로 있을 반전 집회의 계획을 체크했다. 바로 내일 오후에도 각국의 반전평화팀이 다 모여서 하는 집회가 있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와 또 하나 들은 소식은 앞서 임종진 기자가 말한 전쟁 임박설. 시간이 얼마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또한 얼마 없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2003. 2. 28
박기범(한국이라크 반전평화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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