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여행
그럼 마음이 없느냐. 그런 물음은 논리학에서 그저 말할 뿐이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의 반대가 꼭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질량이 있느냐는 것은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질량이 없다는 것은 질량이 있다는 것과 극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3그램의 반대나 3톤의 반대가 0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봄 산이 멀리 물러선다. 산은 물러서고 나는 창문을 넘나드는 새소리를 구분도 하지 못한 채 듣는다. 새는 소리를 내고 4월은 지나갔고 송화 가루로 마당에 빨래를 널지 못한다. 실제 당하는 정도를 넘어 제 때 널지 못하는 이불은 짜증이다. 비가 온다는 그날을 기다린다 좀 간절히. 그리고 가라앉은 그 공간에 이불을 넌다는 이미지다. 이게 뭘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문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그곳은 어딜까. 이곳은 아닌 듯하다.
평화로운 사회를 원하느냐. 강하고 부유한 사회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대개 후자다. 공존이 가능하다고 우기지만 실은 불가능이다. 어떤 이 보다 어떤 이는 보이는 물건에 더 매달린다. 탁발하여 사는 세계는 아니다. 그래도 보다 더 매달리는 사람들을 본다. 민족이 다르고 지역이 다른 그 실체를 본다. 여행에서 당한 사기의 ‘대상물’을 생각하면 역시 다른 것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는 데 십년이었다. 거칠고 예리했던 눈매가 향긋하고 깊어졌다. 그러나 늙었다. 독한 느낌이 반가움의 이면에 있었다. 몸매는 변함이 없었다. 날씬했고 군살은 없었다. 차림새. 옷감의 질이 달라졌다는 인상이었지만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헤어진 것은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녀를 다시 본 나는, 먼저 감정이 약간 격하게 동했다. 그 때의 감정과 일들이 서로 흩날리고 지금의 모습이 나의 상식으로 흔들린다. 어쩌면 이 여자는 십년을 두고 변하지 않는 일정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이었다.
짧은 목표를 깊게 두어도 ‘이해’라는 것은 어렵다. 1그램의 측정과 백만분의 1그램의 측정과 백만 그램의 측정 정밀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인가. 무게를 재는 1그램의 측정기준은 백만분의 일이나 백만 그램은 아예 고려 밖이기 때문이다. 담론이 상식적이라는 것은 물고기가 작은 내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종교나 예술은 이들에게 ‘그저 그런 얄궂은 것’이다. 내가 그녀를 그리 보는 것이 아닌지 괴로웠다. 조심해도 내 중심으로 흐르는 감정이다. 이런 정도면 그 여자가 내게 끼친 감정은 거의 탈락되거나 표백된 것이다. 나는 저 여자를 보고 반가웠고 그리고 그 때가 떠 올랐고 부정의 감정이었다. 나는 그녀가 날씬했다는 그 기억만 들먹거린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감감하면서 소리를 뱉었다. 소리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의 프라이버시에 대해 거의 묻지 않는 나의 습관도 작용을 했다. 그때 그 여자를 조금 알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희미하다.
나는 내가 느끼고 판단한 그 근거를 ‘혹’ 정당하다고 몸에 붙이고 다니지 않는지 자주 되묻는다. 부끄럽다. 인간이 사는 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 것이다. 그 누구에 대한 이런저런 의문이다. 대단히 상식적인 듯한 그 태도를 내가 내게 묻는 것이다. 묻는 나는 누구이고 답해야 하거나 탐구 되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내가 하나가 아니라는 증거인지. 아니면 질문하거나 답해야 하는 그들이 가진 내용이 지나치게 비대하여, 부분이 몇 개의 전부로 보이는 것인가.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묻는 것이고 답해 보려고 버티는 것이다. 감정이라면 더욱 그렇다. 감정은 신들의 세계로 가는 다리라고 한 분들이 꽤나 되기 때문이다.
경험이 절실하지만 경험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지나간 경험이 어떤 형태로든 내 마음에 남아 있다. 내 마음에는 이런 것 외에도 타고난 무엇이 남아 있다. 마음에서 요동치고 흔들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화’시킬 수 있을까.
같이 온 그들과 달리 그녀는 ‘투박한 언어’를 사용했다. 듣는 자가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흰옷을 걸치고 쇼올도 곁들였다. 추운 곳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었다. 장식으로 보기에는 두터웠기 때문이다. 투박했던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점점 황홀해졌다. 황홀이다. 윗옷을 벗고 어깨가 드러난 맨살도 황홀했다. 그래도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실없는 보이는 소리에 악의를 심고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말에 요동도 없이 그들끼리 잘 떠든다. 내가 그들에게 묻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녀에게 묻는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나에게 무슨 말을 던진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했고, 나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런 물음을 하는가.
묻고 보는 그를 탐구하지 않고는 ‘세상’은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마당의 꽃과 새소리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럴 경우 따라 오는 말들의 말이다. 말들의 말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안이다. 그러니 내가 불안을 안고 그들에게 묻는다. 내가 불안을 안고 그저 내 말이 그럴듯한 양 묻는다.
그녀는 흥이 오르면 그 때도 춤을 췄다. 지금 춤을 춘다. 춤이라는 게 희한하다. 그 희한한 느낌을 춤은 가지고 있다. 아마도 저 춤에 자극되고 그녀가 추는 춤이라는 것에 자극되고 또 십년 긴 세월이 있었다는 것에 자극되어 춤을 보고 내가 자극된 반응으로서 춤이 가진 감정이다. 내가 자극에 응답하는 그 방식이 ‘나의 어떤 구성’이고 또 내가 그럴 듯 하게 움직이던 동력이기도 하다.
산이다. 밤이 차갑다. 특히 차가울 때가 있다. 오늘이 그 밤이다. 예감이다. 백만 송이의 하얀 꽃이 달콤한 향기가 비치는 밤이다. 봄날 새소리는 ‘보는 이’의 마음에 들어와 날아 다닌다. 날아 온 새와 같은 새인지 아닌지 분간도 되지 않는 새들이 다시 산으로 날아 간다. 마음은 새가 드나들고 날아 떠나가면서 변화를 만든다. 드러난 세밀한 나의 관찰이 행해져야 할 터인데. 바쁘게 나타난 달콤한 향기니 이 향기도 누구에게는 새가 된다. 마음은 불확정성의 현상이다. 장소이고 동력이다.
-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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