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은 요일도 날짜도 셈하지 않는다.
탑골은 요일도 날짜도 셈하지 않는다.
  • 저녁햇살
  • 승인 2015.10.21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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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편지

 모과

내 키 높이로 열린 모과 열매
선 채로 코가 모과열매에 딱 닿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킁킁거리며 모과 열매에 코를 갖다 대면
벌레에 시달려 상처투성이인 모과가
온 힘으로 향을 뿜어 내어준다.
검게 짙어진 상처를 안고도
모과는 생을 마무리하려고
아스라이 버티고 있다
‘완성, 미완성, 상처’
이런 말들을 떠올리며
모과나무 아래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햇살도 쬔다.

안개

아침 안개가 온마을과 산을 덮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숲길과 나무들
돌아보면 그 길을 다시 안개가 차지해 버린다.
농부의 핸드폰에서는 재난경보음이 울린다.
갈 길이 남아있어도 사람은 넘어지고
재난처럼 인생에도 경보음이 울린다.
나는 걸으면서도 정지된 삶을 생각한다.

내 모든 길들이 뿌옇게 흐려진
10월 어느 날
고장 난 시계처럼
나는
멈춰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나를 뒤따라오며 안개는
잊으라 잊으라
말한다.

 


탑골 만화방에 차들이 와 있으면 주말인 거고 도시에서 누군가 드나들면 휴일인지 안다. 얼마 전까지 나도 주말을 알리는 메시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단 며칠 만에 이곳의 눈으로 저곳을 보게 되었다. 처지가 얼마나 다른 관점을 만들어주는지 새삼스럽다. 마을 어른들이 걱정과 환영의 눈빛을 동시에 보낸다. 나의 존재가 잠시 마을의 화제가 되었음을 짐작한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잠 못 드는 밤을 벗어나 이른 아침 방문을 열면 새들은 어느새 아침식사로 바쁘다. 절대로 사람은 새들보다 부지런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함을 알게 된다. 눈을 뜨자마자 두꺼운 옷을 챙겨 입고 마스크까지 하고 산에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에 숨이 차오른다. 내 삶에 어떤 경고가 있기 전까지 이른 아침에 걸어본 적이 없다. 요즘은 아침마다 뒷산을 걸으며 새들의 종류가 참 많다는 걸 알게 된다. 그놈들이 날개 짓과 소리도 얼마나 제각각 개성이 있는지도 들린다. 어떤 새는 소리만 듣는다면 절대 암컷이 반할 것 같지 않은 놈도 있다. 그 새에겐 내가 암컷이 아니어서 다행일 것이다. 산은 눈도 맑게 하고 귀도 맑게 해준다. 힘든 오르막을 땀이 나게 걸으며 새들이라면 쉽게 갈텐데 했더니 함께 걷던 농부가 말한다. 새들은 날기 위해 전 생을 몸을 가볍게 유지하는 고통을 견딘다고. 우리는 잘살기 위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걸까? 

굽은 길을 몇 번이나 돌아가면 일출을 볼 수 있는 능선이 나온다. 나의 아침 산행은 거기까지다. 송글 땀이 등줄기까지 베어난다. 고요한 숲길에 산행에 나서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웃마을에 귀촌한 부부가 만나는 일행의 전부다. 탑골 어른들은 이런 산행이 가능한 분이 안 계신다. 모두 무릎이 아픈 노인들뿐이고 바쁜 농사일로 시간을 낼 수도 없는 분들이다. 그렇게 이 깊은 마을의 뒷산은 이방인의 차지가 되었다. 날마다 조금씩 단풍이 짙어지더니 이제는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것들이 많아진다. 나의 감탄사는 마음으로부터 나오지만 이렇게 예쁜 것들을 혼자만 보는 게 아쉽다. 그러면서도 지금 여기 있는 내가 현실이 아닌 것만 같다. 가끔은 내 삶의 어떤 오류가 나를 이곳에 데리고 왔나? 하고 멍해지기도 한다. 그동안 단풍은 이렇게 매년 홀로 물들고 졌을 것이다.


오를 땐 호흡이 차고 땀이 흐르던 숲길이 내려올 땐 즐거움으로 가득해진다. 힘들었던 기울기 만큼 가볍고 시원하다. 이 맛에 사람들은 산을 오를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산행을 통해 몸이 회복되는 기운이 느껴진다. 병원의사도 해줄 수 없는 일을 숲이 매일 선물해준다. 다만 나는 거기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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