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은 공부만 아니면 학교가 즐겁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학교 자체를 싫어했다. 따돌림 당하거나 노는 아이들은 격렬하게 학교를 싫어했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가 재미있어졌다. 특히 딱 중간인 아이들, 즉 사물함보다 존재감이 없는 아이들이 살판났다. 학교가 더 이상 공부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한다. 특히 부모가 잘 살지 못하는 아이일수록 그렇다. 그 아이들은 세상을 너무 잘 안다. 흙수저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학교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너무 잘 안다. 35명중에 30명이 잠을 자는 교실은 즉 아이들을 깨우지 않는다는 것은 학교 제도가 어떤 특정한 계급에게는 공부를 시키지 않겠다는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다수의 학생에게 말이다. 이는 통치전략과 닿아있다. 즉 체제가 학교를 통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딱 중간이하의 아이들에겐 학교가 공부하는 곳에서 삶의 공간(먹고, 자고, 놀고...)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부하길 바란다.
공부중독은 공부를 해야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안하면 불안하고 해야만 무언가 하는 것 같고, 공부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또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중단하고 공부하러 간다(핑계를 댄다). 이는 삶의 문제를 회피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있으면 아무도 안 건드린다. 스쿨링 사회=학교의 사회화는 제도 안의 단계를 밟으면 지식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로 자격증을 주는 것이다. 학교화된 공부는 공부를 위해선 삶의 공간이 아니라 제도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교육을 통해 어떤 삶을 키워줄 것인가? 그리스는 탁월한 즉 덕이 있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다. 멋진 삶이 필요하다. 자기 스타일 즉 자기만의 삶의 양식을 가지고 지식과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자유)과 생각하는 손이 필요하다. 추상적으로 기호화된 숫자만 능숙하고 실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삶의 무능력자는 배우기만 하고 익힐 기회가 없다. 이들은 앎을 통해 해방이 되는 게 아니라 ‘앎의 노예’가 된다. 자기 힘을 안다는 건 자기를 안다는 것이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종착점과 같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알라고 하는 것,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폭력이다.
사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것이 뭔지를 안다’는 말이다. 즉 인식과 힘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 모르는 게 뭔지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걸 덮어두고 ‘잠재성’만 말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 막연한 희망과 격려는 학생을 무리하게 하고 파괴시킨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자기주도 학습’도 이와 맥락이 같다. 이런 맥락의 끝은 결국 ‘실패는 개인책임’이라는 귀결로 이른다.
공부의 목적은 ‘겸손’이다. 한계를 무리하게 넘어서려고 무리하게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 교만과 오만을 경계하는 것이다. 삶의 공간으로서의 학교는 삶의 기예를 배우는 곳이고 그곳에선 ‘멋진 삶’을 만들어야 한다. 즉 자기만의 스타일(삶의 양식)을 갖추고 지식과 공부를 통해 자유를 얻고 그것들은 실천해 내는 생각하는 손을 갖는 것이다.
과거엔 삶과 공부가 통합되었었다. 과거의 공부의 목적은 잘사는 것이었다. 근대사회에서는 공부와 사회가 분리되고 필요한 노동력을 기르기 위해 국민공통교과(지식), 태도를 가르쳤다. 학생들의 ‘몸을 만드는 일’은 지루함을 참고 견디는 태도가 공장 돌아가는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적합하도록 시스템화 되어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공부를 통해 문제들 즉 계층상승, 민주주의 등 사회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있는 세대는 공부를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건 부모와 교사들의 세대에 한정된 과거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상위 30%에게만 공정했다. 공부를 통한 경쟁이 공정하다고 여긴 ‘공정함에 대한 신화’는 이제 달라졌다. 그런데 이 신화를 믿는 사람들 즉 부모와 교사들은 ‘다른 건 그들의 힘으로 통제 가능하지 않기에 더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에겐 행선지도 모르는 새벽차로 인식된다. 이 행렬은 마치 난민 같다.
공부중독 현상이 권력입장엔 좋다. 그리고 잠을 자는 학생들이 권력에게 좋다. 일자리가 없는데 다 노력해 나오면 폭동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아이들은 본인이 준비가 안됐다고 여기고 자신이 노력이 부족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제 학교 통치 권력은 이원화 되었다. 경쟁회로는 공부하는 아이들로 서울대 등 대학가는 아이들이며 생존회로는 안 죽고 살아서 졸업하는 걸로 학교를 빛내는 아이들이다. 지금 교사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감시자다.
끝없이 할 수 있다고 강요하는 환경에서는 내 힘의 한계를 망각하고 망상이 나타난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이, 안 되면 피해망상이 나타난다. 피해망상은 누군가 방해해서 그렇게 됐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했을 경우 우울이 온다.
‘멋진 삶의 기술’은 ‘자기를 배려’하는 기술이다. 즉 내 힘이 어디까지인가를 아는 것으로 자신을 배려한다. 폴리스를 만들고 유지하는 기술 즉 정치 공동체, 반정치공동체로 의견을 말할 줄 알며 타협하고 협상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을 멋지게 바라봐야 한다. 아름다움을 알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향유하기 위해 그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아름다움은 질서에서 온다. 몽골 밤하늘의 별들이 각각의 궤도와 속도를 유지하는 질서가 없다면 어찌 아름다운 별잔치가 가능하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먹는 것 밖에 향유할 줄 모르는 것처럼 먹방과 셰프들이 뜨고 있고 블로그, 페이스북, 여행기에도 주로 음식이야기밖에 없다.
말하고 경청하고 토론하는 것이 충분하면 자존감이 느껴진다. 그러면 공부는 재밌어지고 그 뒤가 궁금해서 더 공부하게 된다. 수업이 잘 되는 게 교육이 잘되는 게 아니란 걸 경험했다. 수업을 잘하면 학생들은 수업을 구경하게 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게 아니라 스타와 펜의 관계로 변질 되고 만다. 결국 교사만 공부하게 되고 교육과 수업의 배신의 관계가 나타난다.
사유의 잠재성을 가진 말을 아이들이 하게 해야 한다. 누군가 시간을 독점하면 안 된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은 ‘공부의 기쁨’이다. 이것은 보여만 줄 수 있다. 향유의 테크닉, 즉 기쁨의 정서를 충분히 경험해야 가능하다. 익히는 과정은 고통과 고난, 괴로움과 지겨움을 수반하며 이는 스스로 집중해야 가능하다. 이를 통해 자기를 알아가게 된다. 체육은 가장 쉬운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몸에 집중하여 자기에게 몰입하여 힘을 빼고 자기 힘을 다스리는 성찰이 가능한 과목이다. 자기 몸을 다룰 줄 알고 자기를 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진짜 공부를 하게 되고 진짜 멋진 삶을 살아갈 자신만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