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월 18일(금) 11시 ‘복지국가 정당’ 창당 제안 순천설명회를 마치고 광주공항에서 오후 4시에 지연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기를 탔다. 출발 후 10분쯤 지났을 때 응급환자가 발행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가서 보니, 환자는 의식이 없었고, 창문 쪽 자리에 앉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호흡은 있었으나 맥박이 약했다. 나는 앉은 상태의 환자를 의자 세 개를 합쳐서 그 위에 눕히고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순간적으로 비행기 의자 사이의 좁은 틈으로 내 몸을 밀어 넣고 환자를 들어서 눕혔다.
환자를 들어 옆으로 돌려 눕히는 순간, 나의 오른쪽 무릎관절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나면서 내 무릎이 손상되었다. 순간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으나 의식이 없는 환자를 돌보는 게 먼저였다. 환자는 저혈당 쇼크 상태로 판명되었으며, 오렌지 주스를 먹게 해서 의식이 돌아왔다. 항공기 사무장 등은 내게 수차례 고맙다고 인사했고, 내 다리가 괜찮은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나는 이것을 나의 ‘운’ 또는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했던 것이다.
‘운’에 지나치게 좌우되는 행복과 불행의 현실
비행기에서 내릴 때 무릎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 제주공항을 나와 곧바로 제주대학교 병원 응급실로 갔다. 4살 때의 교통사고로 망가져서 일생동안 나를 지체장애인으로 살게 했던 나의 오른쪽 무릎관절이 또 다시 ‘불운’을 만난 것이다. 초음파 검사에서 관절 속에 피가 고였음이 발견되었다. 관절 손상의 심각성은 나중에 MRI를 찍어봐야 알 수 있다. 정형외과 교수가 주사기로 나의 가련한 우측 무릎 관절낭에서 피를 15cc 뽑아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리고 반 기브스를 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
나는 이것을 ‘운’ 또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 나를 일생 동안 지체장애인으로 살게 한 오른쪽 다리를 늘 조심해서 다룬다. 그런데도 이런 ‘불운’이 생긴다. 4세 이후 지체장애인으로 살게 된 것도 나의 ‘운(운명)’이다. 내가 시골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것도 ‘운’이 듯이 말이다. 누구나 ‘불운’ 보다 ‘행운’을 원한다. 부잣집에서, 건강한 신체로, 높은 지능으로, 그리고 출중한 외모로 태어나길 희망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어떤 이는 부잣집에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고, 유전적으로 지능과 신체능력이 우월하게 태어난다. 어떤 이는 가난하고 지능도 낮게 태어난다. 심지어 신체적 장애까지 안고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에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누구나 행운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런 선택권이 없다. 그래서 행운과 불운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운’에 따른 이런 조건의 차이가 우리네 삶에 있어서 행복과 불행을 사실상 결정해버릴 정도로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운이 나쁘게 태어난 사람들은 대개 불행하게 살아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경향이 너무나 뚜렷하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불운으로 인한 조건의 불리함을 국가와 사회가 제도적으로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야생의 자연 상태에서는 ‘불운’하게도 취약한 조건으로 태어나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연 상태는 신체적 조건과 지능이 우월한 개체가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상태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는 다르다. 그리고 반드시 달라야 한다. 이것은 “인간은 존엄하다”는 원칙(가치) 때문이다. 운이 좋게 태어났든 나쁘게 태어났든, 살아가면서 행운을 많이 만나든 불운을 많이 겪든,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고, 나름의 조건 속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인간존엄의 가치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는 늘 삭막하고 삶 자체가 위태롭다. 여기서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민생불안은 필연적이다. 태어날 때 은수저를 물고 나왔는지, 유전적으로 높은 지능과 건강한 신체를 타고 났는지, 우월한 외모를 타고 났는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없는 이런 ‘운’의 요소가 우리의 삶과 행복 여부를 지나치게 규정한다면, 이것은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을 타고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이는 시장만능과 자유경쟁이 초래한 능력지상주의로서 인간존엄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존엄의 가치를 옹호한다면 승자독식의 시장만능주의를 버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시장만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성공한 엘리트들일수록 더 그렇다. 이들은 경제사회의 효율성과 경쟁력 제고 등의 그럴듯한 명분을 들어 시장만능주의가 지배하는 경쟁시장을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지금까지 20년을 시장만능주의 세상을 강화하면서 살아왔다. 그 결과는 불행의 확대였다. OECD 국가들 중에서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거의 꼴찌 수준이다. 지난 20년 사이에 자살률은 3배나 늘었고 출산율은 크게 줄었다. 세계적으로 최악이다. 이런 현상의 본질은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민생불안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야생의 자연 상태를 가장 많이 닮은 국가군에 속한다. 태어날 때의 조건(빈부, 지능, 신체, 외모 등)의 차이와 이후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운(행운과 불운)의 차이가 너무나 결정적으로 존엄한 삶의 여부와 행복의 여부를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리한 조건으로 태어나거나 살아가면서 각종 불운(각종 위험들)을 겪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행복한 삶도 물 건너간다. 이런 상황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자살률이 3배나 늘었고, 출산율이 급감해서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안 낳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존엄한 삶은 연대의 제도화를 통해 보장돼야
얼마 전에 복지국가 운동을 위해 목포에 간 적이 있다. 목포역에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운전사가 역 주변에서 빵을 나눠주는 교회의 봉사요원들을 비난하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요점은 간단했다. 택시운전사 자신은 거지가 아닌데, 왜 길거리에서 자선으로 택시 기사들에게 빵을 나눠 주냐는 것이다. 이 분은 주장에 의하면, ‘자선’은 ‘존엄’을 해친다는 것이다. 과거 공중파 방송에서도 불쌍한 사람의 처참한 실제 상태를 생생하게 보도하면서 공개적으로 자선을 호소하는 프로그램들(사랑의 리퀘스트 등)이 있었다. 중병으로 아픈데 돈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 방식은 ‘자선’이 아니라 ‘제도’라야 한다. 안정적으로 인간존엄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나는 무릎관절의 부상이라는 ‘불운’으로 인해 응급실 진료를 받았다. 약 7만 원의 비용을 지불했다. 앞으로 정밀 검사와 추가적인 치료에 얼마의 비용이 더 요구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나에겐 국민건강보험이 있고, 교수라는 정규직 일자리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소득이 있어서 환자본인부담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국민건강보험이라는 공적 의료보장제도가 없다면 엄청난 규모의 의료비 때문에 나도 곤란에 처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료비 조달의 어려움과 같은 이런 종류의 곤란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게 된다.
나는 복지국가 강연을 하면서 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저는 늘 기도합니다. 제가 매달 건강보험료를 20만 원 정도 내는데, 5만 원을 더 내고 싶습니다. 저의 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도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다수의 국민이 원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이라는 보편주의 제도가 있지만 보장성 수준이 63%에 불과해서 전체 국민의 70%가 별도로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해있다. 공적의료보장의 부실로 인해 우리 국민이 추가적으로 민간의료보험에 지불하는 비용 부담은 실로 엄청나다.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충분히 회의를 품을 만하다.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에서는 노동자가 건강보험료 5만 원을 더 내면 고용주도 5만 원을 더 내야하고, 법률에 따라 국고에서 수입보험료의 20%인 2만 원을 지원해야 한다. 결국, 내가 5만 원을 더 내면 12만 원이 생긴다. 이 돈으로 순창군에서 고추장 담그는 이름 모를 할아버지의 암 치료비용을 조달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질병을 이유로 ‘자선’에 호소할 필요가 없도록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닥치는 온갖 종류의 ‘불운’(위험)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연대’의 힘이다. 연대의 힘은 위대하다. 연대를 통해 인간존엄의 구현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근로자인 내가 국민건강보험에 5만 원을 더 내면 12만 원이 돌아온다. 그런데 5만 원을 민간의료보험에 내면 2만5천 원 정도가 돌아온다. 민간의료보험은 보험회사 직원의 임금과 홍보비용을 엄청나게 지불해야 하고 이윤도 남겨야 한다. 그래서 가입자가 낸 돈의 절반 정도만 되돌아온다.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5만 원을 내고 12만 원을 받을 것인지, 2만5천 원을 받을 것인지를 선택하면 된다. 누구라도 12만 원을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국민건강보험의 재정 증가율은 정체 상태인데 비해, 민간의료보험은 해마다 시장 규모를 비약적으로 늘려나가고 있다.
‘복지국가 정당’이 해결책이다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이 제도로 확립되어야 제대로 된 민주주의이다. 복지국가 강연을 다니면서 물어보면 사람들 대부분은 ‘5만 원을 내고 12만 원을 받는’ 쪽을 선택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거대한 괴리는 바로 ‘정치의 실패’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료를 더 내는 것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낡은 정치는 ‘건강보험료 인상 자제’를 들먹이며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다. 그러면, 누가 건강보험료 인상을 반대하는가? 재벌대기업을 포함한 고용주들이 반대한다. 보험회사들이 반대한다. 정부의 경제부처가 반대한다. 그리고 이들과 연계된 ‘낡은 정치’가 국민여론을 호도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반대한다.
나는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지난 4년 동안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해왔다. 건강보험료를 우리가 지금 매달 내고 있는 데서 25% 정도를 더 내면, 민간의료보험에 별도로 가입할 필요가 없도록 간병비용을 포함해서 병원비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고, “연간 본인부담의료비 100만원 상한제”를 실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국민들이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하면, 서민가계와 보통사람들은 돈을 벌게 된다. 민간의료보험에 내고 있는 돈의 일부만을 국민건강보험으로 돌려내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약한 돈은 소비의 확대에 기여해서 내수경제의 활성화에도 유익하다.
연대의 제도화 사례는 “건강보험 하나로” 말고도 많다. 우리는 선진복지국가들에서 그런 사례들을 충분히 보고 있다. ‘연대의 제도화’에서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타고난 조건(빈부, 지능, 신체, 외모 등)의 차이를 떠나서 누구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존엄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연대의 제도화’이다. 이것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을 제도적으로 실천하는 것인데,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적으로 국민 모두의 ‘적극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운(위험)에 대비하는 4대 사회보험 등의 사회보장제도 확립을 통한 ‘연대의 제도화’이다.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지난 8년 동안 줄기차게 이런 주장을 정치사회적 공론으로 제기해왔다. 우리가 주장해왔던 보편적 보육과 기초연금 2배 지급 등의 일부 정책은 다소 부족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편(적극)적 복지의 확충과 경제민주화 등의 복지국가 정책은 여야 거대양당의 2012년 총선과 대선 공약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 거대양당의 ‘낡은 정치’가 사실상 국민을 속인 것이다. 거대양당은 기득권 구조에 손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땜질식 처방을 고수하고 있으나,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 없이는 경제침체와 복지수요의 폭증이라는 구조적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승자독식의 시장만능주의를 선택해서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초래했던 거대양당의 ‘낡은 정치’로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역주의 정치와 인물 중심의 패거리 정치라는 ‘낡은 정치’는 혁파의 대상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복지국가의 가치와 정책을 실천하는 ‘복지국가 정당’이 필요하다. 시민운동의 힘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민의 참여와 지지로 ‘복지국가 정당’을 만들어 ‘낡은 정치’의 불판을 갈아야 한다. 인간존엄, 연대, 정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국민 모두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복지국가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지금 우리 국민의 손에 달려있다.
[복지국가 칼럼]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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