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자들의 수다를 쓸데없는 시간낭비 취급을 했던가?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비하는 수도 없이 많지만 ‘술도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으며 대화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남성들’은 늘 여자들의 대화를 ‘수다’라 격하시키는 걸 보고 자랐다. 그런데 ‘티타임’은 여자들의 수다가 영화의 주제가 되었다. 그것도 80이 다 돼가는 칠레의 여고 동창생들이 나눈 유쾌한 수다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티타임의 주인공들은 늘 맘껏 치장을 하고 화장도 곱게 하고 모인다. 모임 장소는 친구 집을 옮겨가며 하는데 차와 어울릴 음식들을 정성들여 장만해 내 놓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의자하나 곁에 슬쩍 얹어 함께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로 정감 있고 품격이 있었다. 영화의 색감도 주인공들의 의상과 음식, 집의 풍경 등으로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누구나 들어와 앉으라고 손짓할 것 같은 분위기다.
졸업 후 60년이 넘도록 아니 매달 티타임에 모여 그녀들은 자신들의 모든 걸 함께 해 왔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가 된 나이다. 그녀들은 그 모임과 함께 늙어갔고 그러다 한 둘씩 생을 마감했다. 영화 속 사진은 여고생시절부터 할머니가 될 때가지 계속되고 있으며 60년을 넘기면서 친구들은 빠르게 사진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죽음도 삶의 한 부분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순서를 달리한 사라진 친구들을 늘 기억하며 얘기 속에 끌어들이고 기도했다.
그녀들은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나눈다. 젊음과 사랑, 우정과 인생에 대한 어떤 주제도 유쾌한 수다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외톨이가 된 다른 멤버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같이 늙어가던 친구들이 먼저 가버린 외로운 이웃을 친구로 손잡아주는 장면도 따뜻했다. 물론 어디나 까칠한 성격도 소유자도 있기 마련이어서 한 친구는 그걸 반대했지만 나중엔 그렇게 받아들인 멤버가 몇 안 되는 친구로 함께 티타임에 남게 된다.
기억력이 약해진 친구는 자신이 한 얘기도 잊어버리기 일쑤고 비교적 기억력이 좋은 친구가 대신 기억의 오류를 수정해주며 이야기는 계속된다. 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친구, 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밝은 기운이 넘친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꺼내든 모두가 공감하거나 할 얘기가 있는 사이가 되는 건 쉽지 않다. 그녀들이 작정하고 60년을 만난 건 아니었겠지만 그녀들에게 배우고 싶은 건 ‘친구와 유쾌함’이었다. 늘 친구를 곁에 둔 삶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모일 때마다 장애를 지닌 한 친구의 딸은 플릇을 연주한다. 연주는 초보수준에도 달하지 못하고 매번 더 나아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서는 유일한 무대에서 친구들은 마음을 다해 브라보를 외치며 곡이름을 물어본다. 그렇게 친구의 아픔을 함께 위로하고 곁에 머물러 준다.
영화가 끝날 때쯤 티타임엔 3명밖에 남지 않는다. 이쯤 됐을 때 나는 우리집 가족 사진을 쳐다보았다. 누구나 모여서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중에 그들 중 한 두명씩 사라져갈 날을 생각하진 못한다. 나는 티타임을 보며 사진 속 사람들이 새롭게 보였다. ‘함께 여기에 있다는 것의 의미와 유한성’에 대해서 그날이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한편으론 티타임의 그녀들처럼 주름이 가득한 미소를 서로 나눌 친구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나의 감동은 나만의 것이 아니어서 이 작품은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녀들이 살아있다면 아마 기념 티타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는 또 얼마나 유쾌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