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서툴다는 것 역시 상대적인 것이었다. 운전에 자신 없는 내가 괴산에서 함께 연수를 가는 셋이 모였을 땐 가장 나은 처지가 되어 핸들을 잡았다. ‘자연인’은 차도 면허도(?) 없었고, 자연인이 소개한 7개월차 괴산댁이 된 영준샘은 초보였다.
영준샘은 인상이 참 좋았다.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로 하고,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부부의 새로운 삶을 위해 괴산을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정착지를 찾는 중이라는 그녀는 온 가족이 그런 선택에 행복해한다고 전했다. 괴산행을 위해 남편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연식초를 만드는 일을 연구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괴산읍의 초등학교에서 시골아이들과 사는 게 좋다고 했다. 누군가의 행복한 옆모습을 보는 일은 그 행복에 나도 스며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탑골에서 함께 살 사람을 찾던 나에게 그녀의 출현은 아주 근사한 만남이었다. 자연인도 탑골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으니 이날 만남은 어쩌면 하늘이 맺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인이 자신의 학교 텃밭에 들러 허브를 가지고 가자했다. 허브를 이용해 연수 마지막 날 분과모임에서 안주를 만들 거라고 했다. 괴산북중의 텃밭과 예절관은 작은 시골집을 연상케 했다. 아담하고 예쁜 공간이 방치된 채 자연인의 손으로 텃밭만 살아나있었다. 잠겨있는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부터 햇살은 뜨거웠다. 우린 다시 차를 타고 옥천을 향해 출발했다. 청천, 보은을 지나는, 가능한 옛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그렇게 셋이서 ‘우리’가 되었다. 신호등 없는 구불구불한 지방도를 운전하며 거리에 신호등을 없애기로 한 도시를 읽은 기억을 떠올렸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우리의 사고를 경직시켜 버리는 것들, 그중의 하나가 도시의 신호등이다. 지방도를 이렇게 오래 운전해본 경험이 없어서 옥천으로 가는 일이 내겐 여행처럼 느껴졌다. 어떤 것도 내게 ‘멈추라는 명령이 없는 도로’에서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처음 만난 영준샘이랑은 금방 친해졌다.
아무데나 ‘걷는 걸 밥 먹듯이’ 하는 자연인은 이미 우리가 갈 길을 많이 걸어보았다고 했다. 느릿느릿 운전자도 풍경을 구경하며 마치 ‘차가 걸어가는 느낌으로’ 가다보니 배가 고파졌다. 우리는 자연인이 안내한 보은군 산외면의 오래된 식당으로 갔다. 밖에서 보면 가정집 같은 소박한 곳이었다. 주인이 쓰는 물건, 냉장고, 수확한 감자, 손님들한테 줄 김들이 그대로 놓여있는 방에 앉으니 손님이 아니라 오래된 친척집에 온 듯 했다. 자연인은 막걸리를 곁들였다. 그의 막걸리는 나중에 그가 언제가 배웠다는 ‘민요’가 되어 차에 울렸다.
자연인의 노래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이렇게 놀면서 다니는 유랑여행을 기획해 보자고, 벗들이 있는 어디라도 그곳까지 가서 이야기 나누고 산수를 구경하는 만남을 해보자고. 차에 탄 우리 셋은 모두 괜찮다고 말했다. 옥천의 배바우 도농교류센타에 도착해 인사를 나누고 우린 허브를 다듬었다.
첫날 이계삼 선생님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항상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원초적 고뇌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 누군가는 그처럼 자꾸만 삶을 흔들며 자극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가 학교를 그만두고 어찌하다 밀양사람이 돼버린 이야기를 그는 ‘알리바이’라는 말로 풀어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그리고 사람들이 가슴으로 가져간 말들은 조금씩 다를지 모른다. 그런데 ‘고민 많기로, 생각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벗들이기에 다들 그가 던진‘ 인색모색전환’과 ‘파국’에 대한 동의를 전제하며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 같다.
핵발전소의 위험성이나 이상기후 등 우리의 삶을 완전히 파탄 낼 위기들에 대해 우린 더 물러설 곳도 숨을 곳도 없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내가 늘 아이들과 주변사람들에게 하던 말과 같다. 그러나 나의 지난 시간들에서 배운 것은 어떤 것도 억지로 되진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옳은 것으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무언가 끓어올라야 움직인다. 그런 내면적 절박함은 동시대 사람들이 동시에 갖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그래서 그도 ‘인색모색전환’이란 말을 쓴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실천과 친구를 들었다. 내게 강하게 인식된 단어는 ‘단절’이었다. 또 여러 활동을 통한 이야기, 우정, 깨달음이 ‘몸의 기억’로 저장될 수 있을 때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그를 보며 우리 아이들을 생각했다. ‘아이들 몸의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까?
어쩌면 밀양의 마을들이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예견을 하면서도 싸움에 지지 않았다고 결론내리는 건 싸움을 통해 달라진 인식과 그걸 통해 얻은 끈끈한 사람들의 연대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탈핵에 이르고 우리가 송전탑을 폐기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싸움은 절대지지 않은 것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엔 6시에 일어나 7시부터 둔주봉 산행을 했다. 길옆까지 꽃들과 토마토, 옥수수까지 심어놓은 정겨운 마을과 학교를 지나고 참깨밭과 도라지꽃을 보며 둔주봉 오르막을 향했다. 땀을 흘리며 도착한 둔주봉에서는 우리나라 지형이 거꾸로 드러난 한반도가 금강줄기를 몸에 감고 있었다. 봉우리에 세워진 정자엔 시원한 바람이 선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엔 배바우 도서관으로 걸어가서 주교종 도서관장님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의 모든 표현과 말씀엔 연륜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있었다. ‘내가 못하면 아들이 하면 되고 그래도 못하면 손자가 하면 되지유.’ 작은 농촌마을에서 30년 가까이 농민회부터 여러 일들을 해오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도서관 작은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주는 그 순간이 젤 좋았다고 말하는 벗들도 있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 장소에서 내 삶과 그들의 삶과 엮어지는 과정은 그런 긴 호흡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가슴치는 어려움들이 있었을까도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그 작은 방안에 ‘쉽게 떠나고 포기하는 도시의 사람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 존경심’이 흘렀다.
점심을 먹고 휴식시간에, 금강휴게소 풍경이 아주 근사하다고 자연인이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유본능이 강한 몇 명이 모였고 우린 차 두 대로 나눠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강줄기 따라 작은 일탈을 감행하니 자유로운 공기가 좋았다. 내 몸엔 참 이상한 피가 흐르는 거 같다. 좋아서 온 연수인데도 잠시만 갇혀 있으면 답답함을 느끼니 말이다. 창밖의 경치를 보며 우리나라는 어디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해남에서 오신 ‘엄마’샘과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아이들이 푹 안길 것만 같은 선생님 입에서 사투리가 베어 나올 때마다 나는 고향을 느꼈다. 휴식 시간 내에 돌아오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멀고 비포장 도로가 길어서 우린 한 꼭지 강의를 듣지 못하고 말았다.
오후 강연에서 만난, 옥천신문사의 편집장을 지냈고 옥천 순환경제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전순영님의 이야기도 참 좋았다. 농촌 지역에서 숱한 좌절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건 결국 주변의 든든한 사람들 때문이었다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낮에 본 금강줄기보다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빼앗기지 않도록 다함께 지켜낸다’라는 옥천, 청주 사례의 이야기 나누기에서 청주 생활공동체 ‘공룡’의 박영길님은 내 모습 같기도 해서 더 친근감이 갔다. 곳곳에서 좌충우돌을 겪고,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사례에서 공감의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의 단호한 자기주장 같은 ‘어줍잖은 협력 혹은 신념을 변형시키라는 손’을 과감히 버리면서 ‘더 가난해지고 실패하는 쪽을 택한 그’에게 안쓰러움과 강한 매력을 느꼈다. 그와 나처럼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태생이란 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녁 식사 후 바느질 분과모임에선, 짧은 시간 안 쓰는 스카프를 이용해 옷 만드는 법도 배우고 예쁜 꽃을 수놓는 방법도 배웠다. 여자들만 도란도란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으니 옛날 우리 조상들이 밤이면 이런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됐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었을 우정과 이야기가 낮 시간의 고된 노동과 시집살이의 한도 풀어주었으리라 생각되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지나난 시간들이 쌓여야 하는데 바느질은 바로바로 결과가 보이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다음 연수 때는 밤마다 이런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아니면 벗에서 바느질 연수만 따로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뒷풀이 시간엔 분과모임 요리팀의 실력으로 안주가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바느질 팀이 자연스럽게 뒷풀이까지 함께 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예쁜 시간들이었다.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사람이 모여서 지낸 2박 3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드는 순간이 많아서 좋았다. 태봉고 박경화샘과 그 제자들의 모습도 멋지고 연수 때마다 훌쩍 자란 모습 보여주는 엄마 손잡고 따라온 아이들도 예뻤다. 이우학교 온 선생님, 사서 고생한다는 사서샘과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은 늘 ‘길 찾기’ 중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고민들 속에 잠시라도 내가 있어서 좋았다.
‘누구를 만나도 따스함과 미소가 먼저 나오는 여름연수’를 지내며 우리는 왜 자기 삶에선 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벗들의 모습에 뭔가 많은 걸 담아가는 경쾌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괴산팀도 다시 차에 짐을 싣고 출발했다. 자연인은 이야기 대신 술을 마셔댄 이유로 몸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가 이번엔 빠른 길로 가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길치인 내게 졸면서도 좌로, 우로 방향을 안내했다. 그걸 듣고 운전하며 온갖 잔소리를 해대는 나와 뒤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솔내는 다시 ‘우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