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예 린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재학생)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칼럼 공동연재
지난 봄 학기 때다. 한 선배와 점심식사를 하며 우연히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대해 들었다. 내가 유럽의 복지국가에 관심이 있다고 했더니, 자신이 지난해 한국에서 학생 인턴을 했던 복지국가소사이어티라는 단체를 소개해준 것이다. 선배와 헤어지자마자 기숙사로 돌아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바로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그리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로부터 인턴쉽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다. 성남시청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에서 느낀 점
한국에 돌아와 그 동안 숙원 사업이었던 라섹수술을 한 후 어두컴컴한 방을 벗어나 밖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내가 처음 한 일 중의 하나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운영위원장님을 만나 복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한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해 창립했다는 씽크탱크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인턴쉽 기간 동안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 주에는 ‘지방자치와 복지국가’를 주제로 각종 회의와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마침 시기적으로도 잘 맞아, 지방선거와 관련되어 지방정부의 인수위원회 회의에도 참가하고 지방자치에 대해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지난 선거에서 ‘복지국가 인증 후보’였던 현재의 성남시장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제안한 정책을 자신의 공약으로 채택하였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선거 이후 실제로 성남시에서 구체적으로 복지국가 공약들이 현실 정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성남시청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에도 참석하고 <100세 시대, 공공의료정책 추진 전략과 사례>를 주제로 한 조찬강연도 들어보며, 여러 가지 인수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정리하는 종합보고대회에도 참석할 수 있는 값진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지방자치와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이전에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지방자치나 행정학 등을 전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들었던 내용들을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나는 그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고, 일반시민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봐도 그 내용과 과정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잘한 질병들을 달고 살았다. 지난해에는 본의 아니게 큰 수술을 해서인지, 복지국가의 많은 내용들 중에서 특히 의료 관련 정책들에 관심이 많이 갔다. 그래서 성남시의 정책 토론 관련 회의를 통해 배운 100만 주치의 제도, 성남시 의료원 건립, 4대 중증질환자들에 대한 간병인 지원, 그리고 공공산후조리원 운영 등에 대한 내용은 집에 가서 다시 책자와 자료들을 보면서 내용을 익혀 나갔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현장에서 들었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100만 주치의 사업”과 단골의사제도
학생 인턴 과정에서 배우는 자료의 하나로 이상이 공동대표님이 지은 <복지국가는 삶이다>라는 책을 읽고 또한 많은 것은 느꼈다. 특히, 단골의사제도에 대한 글귀가 생각에 남았다. 성남시에서 주요 공약으로 추진하는 “100만 주치의 사업”이 결국 모든 시민들이 단골의사를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 동네의 소아과 한 곳을 꾸준히 다녀서, 내가 유학을 갈 때 16년 치의 건강 관련 서류를 한꺼번에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유학을 가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친구들 말로는 일 년에도 몇 번씩이나 병원을 쇼핑하듯 바꿔서, 외국의 대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건강 관련 여러 증명서들을 다 추적해 받는 데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것만 보아도 주치의 제도는 매우 의미가 있고, 주치의가 단순히 질병의 치료 뿐 아니라 건강증진과 예방보건서비스 등의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그런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이 없어 평소에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점점 고령화되어 가는 우리나라에서 주치의에 의한 그런 서비스들이 제공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민간까지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공공의료 정책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학교에서 들었던 "Technology and Welfare in the 21st Century"라는 수업에서 강의를 하신 교수님께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발달된 산후조리 제도에 대해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해 주셨다. 그분은 자기의 딸이 정부가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미국보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보장해주는 영국에서 아이를 출산해서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에서는 최근 의료민영화 또는 의료영리화에 대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의료민영화 추진이 의아스러운 이유
정부는 산업발전과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을 위해 의료민영화를 추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공급자인 의사들이나 수요자인 대다수의 국민들은 반대하고 있다.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의료민영화의 대표적인 국가로 손꼽히는 미국에서는 금융과 투자 관련 회사나 고소득자 등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미국에서도 상류층으로 분류되는 교수를 비롯한 다수의 시민들은 국가가 의료에 대한 책임성을 가지고 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의료를 보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 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공적 보장만을 제공하는 의료보장제도를 가지기 위해, 이것이 지난 몇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사회적 쟁점이 되고, 여러 대통령들이 공약으로 추진하였지만, 성과도 변변치 못하고 여전히 문제가 많다. 그런데 미국에 비해 훨씬 좋은 의료보장제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 오히려 자신의 좋은 제도를 지키면서 더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고 다수의 미국 국민들과 의료전문가들은 원하지도 않는 이러한 제도를 우리나라에 도입하려는 통에 사회적인 논란이 되는 것이 나는 의아스러웠다.
한국에서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는 분들은 미국 유학을 하셨거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있는 분들이 많을 것인데, 미국에 가서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한번이라도 물어 보았는지가 궁금해진다. 미국의 신문이나 TV뉴스를 한번 제대로 보기만 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대한민국이 역동적인 이유: <복지국가는 삶이다>
오늘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토론 동아리 후배들을 훈련하러 모교를 방문하였는데, 거기서 복지국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매우 뿌듯했다. 토론 주제는 “한국 정부는 누진세를 도입해야 되는가?”였다. 예전에는 이런 주제가 나오면 내가 더 잘 알고 공부했던 미국, 프랑스, 스웨덴이나 핀란드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나열했었을 나지만, 오늘은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과 정책들, 대기업의 횡포와 정부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느끼고 체험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개했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의 사례들은 가끔가다 고명을 얹는 식으로 부분적으로 첨가하였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살아온 당당한 한국인이지만 영어가 더 편하고 지금까지 한국 정치나 정책 상황 보다는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정치판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이는 부끄러운 일이다. 이번 인턴쉽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도 “이번 인턴쉽을 통해 다른 나라가 아닌 한국 복지정책의 역사 그리고 현실과 미래에 대해 더욱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벌써 모국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운 것 같고, 후배들에게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해주는 나 자신이 많이 자랑스러웠다.
그 다음 주에는 서울 성북구에서 개최된 ‘민선 6기에 추진할 지방정부의 정책’들에 대한 시민 공청회에도 참석하였다. 마치 스위스에서 운영하고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한국판 사례를 보는 것 같았다. 당선된 구청장이 제시한 공약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실제로 시민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공약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신선하게 다가왔다.
국회에서 열린 ‘비례대표제도 확대’를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지방정부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어떻게 복지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해 국회의원들과 전문가들의 토론을 들을 수 있었다. 인턴쉽을 마치기 전에 한국의 대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아직은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나 자신이지만, 인턴쉽 기간 동안 더 많은 경험들을 하면서 조금씩 더 우리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의 활동과 참여를 통해 장차 우리나라에서 보편적 복지가 구현되는 ‘복지국가로의 대전환’에 대한 의지와 희망을 보았다. 이상이 교수님이 쓰신 <복지국가는 삶이다> 등의 책들을 보면서, 정책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살아오신 삶에 나타나는 국민 모두를 위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열정과 용기가 감동적이었다.
또한 상근 연구원들과 직원들의 열정적인 모습이나 헌신적인 노력들을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되었다. 대한민국이 역동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노력들이 현대사를 바꾸어내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미래와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느껴진다. 이제 방학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가면 수업시간에도 발표를 할 거리가 많아졌고, 친구들에게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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