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부르더호프 탐방기(1)
영국 부르더호프 탐방기(1)
  • 김경일신부
  • 승인 2003.05.11 0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국 부르더호프 탐방기(1)

영국 부르더 호프 탐방기(1)

 연재를 시작하며
 1. 죽을 길로 가자

2003. 5. 10. 김경일 신부      

 

 

@ 귀국하는 날,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공항 식당에서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 가족이 방문해 살던 부르더호프(Bruderhof:형제들의 집)공동체는 재세례파에 속한 것으로 분류되며 영국에 둘. 미국에 여섯. (뉴욕주에 넷. 펜실베니아 주에 둘). 호주에 하나가 있습니다.

영국 부루더호프 공동체는 런던을 중심으로 남동쪽, 기차로 2시간 거리의 로버츠브리지에 있는 다벨(Darvell)에 위치해 있습니다.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와 칼빈, 쯔빙글리가 카톨릭에 대한 개혁에 초점을 맞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종교개혁 세력과 카톨릭간의 신학적 논쟁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구체적으로 이루는 삶의 방식을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이라고 보고, 서로 물질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형제애적인 사랑을 실제 그들의 삶 속에 실천하는 삶을 삶으로서 당시 기성교회에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고, 이는 곧 질서를 흐트린다는 명분으로 수천명에 이르는 끔찍한 순교자를 낳는 박해를 유발 시켰습니다. 박해는 카톨릭보다 개신교가 더 심했습니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는 대신 판단능력을 갖춘 뒤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주로 받아들여 침례를 받기 때문에 재세례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재세례파에는 크게 메노나이트와 후터라이트라는 두 그룹의 공동체가 있는데, 부루더호프는 후터파로 분류됩니다. 특히 부루더호프는 전쟁반대, 양심적 병역 거부로 많은 희생과 오랜 고난의 삶을 산 경험이 있으며,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이를 생애의 가장 큰 긍지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부루더호프는 유명한 강사요, 저술가롤 알려진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가 1920년에 독일의 샌너쯔라는 조그만 마을에 초대교회의 삶에 기초한 공동체를 성립하는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공동체를 설립할 때에 후터파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았으나, 설립 후에 현재 북아메리카에 존재하는 후터파공동체를 알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루더호프는 나찌의 박해와 2차대전의 북새통 가운데서도 살아났고, 독일에서는 가증되는 어려움 속에 1937년에 추방 되었으며, 영국에서 다시 부루더호프를 재창설했으나, 결국 전쟁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받아 준 유일한 국가인 남미 파라과이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차대전 후 195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에 다시 지부를 세우기 시작했으며, 결국 20년에 걸친 파라과이 정글 속 생활을 정리하였고, 오늘날 미국과 영국, 호주에 9개 공동체로 자리잡았습니다.

 

1. 죽을 길로 가자

 

홍콩에서 잠간 쉬었던 비행기가 무려 16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런던 히드로공항에 도착했다. 큰놈인 윤경이(16세)는 추운 방에서 며칠간 이삿짐을 싸느라고 힘들었는지 목감기가 심하게 와서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어쨋든 지친 몸을 추스려 입국심사대까지 왔다. 애써 작성한 랜딩카드 4장이 안보인다. 주머니를 뒤지며 허둥대는 나를 바라보던 딱딱한 표정의 그 아줌마는 차가운 목소리로 '넥스트'를 외쳤다.

다운증후군을 앓는 9살난 둘째놈이 하도 날뛰는 통에 애써 작성한 카드를 쓰래기통에 버리고, 실수한 카드만 제출했으니 이런 대접을 받는 거다.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낸 카드를 들고 이번에는 착해 보이는 젊은 담당관에게 갔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이 통하는 아내에게 질문을 해댔다. 무엇하러 왔냐? 여행하러 왔다. 어디를 여행할 거냐? 런던에 있는 동생 집에 갔다가 부루더호프를 방문하려 한다. 동생 집에는 얼마나 있을 거냐? 2주정도 있을 거다. 부루더호프는? 최소한 한 달 이상을 있을 거다. 거기서는 뭐할 거냐? 일할 거다. 월급은 받냐? 안 받는다. 왜 일하는데 월급을 안 받냐? 우리는 공동체훈련을 받으러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질문과 대답이 엉키기만 한다. 담당관의 요청에 의해 나는 가진 돈과 마스터카드까지 다 꺼내놓아 보였다.

대영제국의 문턱은 역시 높았다. 우리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섰던 줄에서 밀려나 줄 사이의 긴 의자에 앉아 최종심사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고, 30분쯤 지나니 업무에 방해가 된다고 더 구석진 자리로 옮기라고 지시가 떨어진다. 1시간이 지나니 다시 로비 끝의 변소 출입구 옆 벤치로 옮기라고 한다. 윤경이는 목감기로 인한 고열로 의자에 길게 누워있고, 주경이는 지루한지 거침없이 입국심사대를 넘어 어디론가 가버린다. 우리는 입국심사대를 넘어갈 수 없으므로 의자에 널브러진 윤경이를 일으켜 세워 주경이를 찾아오게 하였다. 상황을 알아차린 입국심사관들은 윤경이 녀석이 입국하는 것을 허락한다. 주경이는 눈치를 살피다가 기회만 있으면 보란 듯이 심사대를 넘어가 우리를 놀라게한다. 하기야 주경이에게 국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변소 옆 공공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타는 속을 달랜다. 몇 년 전 동료신부들과 이곳을 여행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내는 두 눈을 꼭 감고 입술을 깨문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 나는 무력하게 혼자 말을 하듯 주님께 넋두리를 하였다. "주님, 저는 당신의 사인(Sign)이 틀림없다고 믿고 아무런 생각없이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당신의 음성을 잘못들은 것입니까?" 마치 전선에 나가는 병사인양 친구들과 환송회를 거듭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작년 8월(2001년)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과 오랜만에 만난 스승을 모시고 며칠간 생활나눔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헤어질 시간이 되어 스승이신 이현주 목사님이 여러분께 해주고 싶었던 말이라며 '죽을 길로 가자'라는 말을 화두처럼 던지고 가셨다. 살아있는 말이 그렇지만, 그 말은 가슴에 박힌 화살촉처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깊이 파고들면서 통증을 더하여갔다. 당시 나는 예수원측으로 부터 5개월 장기휴가를 허락받아 포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4년 동안의 예수원 생활은 더 이상 지속할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였고 다시 목회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구태의연한 생계의 방편으로만 여겨졌다.

"주님, 저는 이제 어디로 가야합니까?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딱히 가야할 바를 찾지 못해 넘어져 엎드린 저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밥을 먹고 살았지만 결국 종교의 진정한 세계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적당히 시늉만 내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떤 놀라운 깨달음의 말씀도 그저 절실함이 사라졌습니다. 다 남의 얘기일 뿐, 내 안에서 터지는 내 노래는 아니라는 생각에 힘겹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어도 그 세계는 제게 도달 불가능한 세계일 뿐입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어느 정도 세월이가면 성경의 인물이 경험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 지리가 기대했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눈도 귀도 흐려져서 방향을 잃고 허둥대는 모습이 꼭 자다 깬 사람 같습니다. "

"주님, 그냥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까? 제가 받은 소명이 제복 뒤에 숨어 종교를 코에 걸고 적당히 사는 것일까요? 왜 저는 진리의 세계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절대의 세계는 단지 문자의 세계일 뿐인가요? 절대사랑, 절대용서, 절대평화...... 한때 가슴 설레며 되뇌이던 말들이, 어느새 절망의 언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덧 제게 남은 것은 뻔한 기성품의 그저 그런 삶이 되고 마는 것인가요? 이제 젊지도 않은 중늙은이가 되어서 조바심만 치는 꼴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

작년 10월 중순 경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저녁에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를 보고 있었다. 개회기도를 하고 성경을 펼치는데 문득 부루더호프라는 말이 떠올랐다. 머리속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하느님이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다. 그래! 바로 거기다. 내가 죽을 수 있는 곳. 말로 먹고 살던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곳, 과대포장과 안개 피우기가 불가능한 거기서 내 자신을 확인해 보자. 내가 도대체 어디쯤 와 있는지. 더구나 거기는 세계 공동체 중에서 건강하고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때부터 아내를 독촉했다. 인터넷을 뒤져보자. 주소를 알아보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음을 굳히듯 친구들과 이별주를 나누었다. 공부라면 손사래를 치던 내가 영어회화를 공부한답시고 밤을 세우고, 체력을 키우느라 매일 10키로미터씩 해변을 달렸다. 책이고 살림이고 다 남에게 맡기고, 살던 집까지 정리한 뒤에 아주 이민이나 가는 듯이 가방하나씩만 들고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주님, 이제 그냥 돌아가야 합니까? 벌써 3시간이 지났습니다. 살 집도 남겨놓지 않고 온 제가 이 식구를 이끌고 갑자기 어디로 가야하는 겁니까?" 아내가 기운을 차린 듯 다시 나를 재촉했다. "여보, 전화 걸 수 있는 데를 다시 한번 알아봐요, 밖에서 영문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을 신부님 생각을 해보라구요." "여보, 그게 문제요? 입국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지. 괜히 조 신부님 입장 곤란하게 하지 말고 담당관의 처분에 맡깁시다."

나는 다시 손에 쥔 입국저지 이유서라는 것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그 안에 해답이 있기라도 하듯. 2/2/2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2002년 2월 2일이란 뜻이겠지? 함께 억류되고 있던 일본 아가씨도 입국하고, 우리 가족만 남았다. 날뛰던 둘째놈도 지쳤는지 로비바닥에 아예 팔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갑자기 인형처럼 예쁜 여자 담당관이 우리를 불렀다. '6개월'이라고 체류기간을 알려주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진이 빠질대로 빠진 나는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통로를 빠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다. "지독한 놈들, 내가 영국에서 돈을 쓰면 사람이 아니다."

짐 찾는 곳에 젊은 한국인 신부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는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해 이민국에 알아본 것이다. 그는 우리 가족이 정말 하느님이 도운 케이스라고 했다. 억류시간이 길어지는 경우 대체로 되돌려 보내거나, 출국했다가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신부님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긴장이 풀리면서 금방 심한 갈증이 왔다. 할 수 없이 근처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생수와 탄산수를 샀다. 화가 나서 욕을 했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살고 봐야지.

조신부님은 한국성공회를 대표해 영국에 파견된 신부님이시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유학중인 후배신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픽업하러 나오신 것이다. 그는 지도를 보며 1시간 반 정도 달려야 할 것이라면서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신부님, 영국생활에서 한국생활과 다른 가장 조심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정직성의 문제일 겁니다. 흔히 한국사회에서는 상대방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은 허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얀 거짓말'이라고 불리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그것조차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한번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면 신뢰를 잃는 것은 물론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차가 시골 길로 접어들면서 비치그로브 부루더호프라는 간판이 보이고 초지가 잘 조성된 넓은 목장, 소떼들과 말을 탄 소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는 오래된 붉은 벽돌로 지은 성채같은 건물이 자리잡고 여기저기 기숙사 건물형의 몇 동의 건물이 흩어져 있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머리와 수염이 은백색으로 빛나는 할아버지 한분이 사무실에서 나와 큰 소리고 우리를 맞이했고, 뒤이어 50대 안팎의 부부가 우리를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스티븐 킹과 루실킹. 손님인 우리를 도와 줄 호스트(host)라고 했다. 여기서 호스트가 맡은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거의 생활을 함께 하다시피 하면서 게스트가 공동체 생활을 잘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우리가 살 집을 안내해 주겠다며 가방을 받아들고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기대감과 흥분으로 온 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순간부터 새로운 사건과 인간관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행복감에 취해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우리가 살 집은 입구가 세곳이 있는 기숙사형의 이층건물이었다. 우리는 건물 중간의 입구로 들어가야 했다. 문 앞에는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큰 흰 개가 엎드려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윤경이는 큰 개를 키우는 것이 소원이었다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개는 스페인산 인데 사람에게 몹시 친화적이라고했다.

이층에 마련된 우리의 숙소는 침실 2개와 식탁이 있는 거실, 그리고 좁은 간이 부엌, 욕조가 딸린 화장실이 배당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은 아랫집 식구인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 정도의 남자 아이들 방이었다. 아랫집은 6자녀를 둔 죤킹, 에스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죤킹은 호스트인 스티븐킹의 동생이었다. 3평정도의 방들은 각기 침대가 있었고 난방용 라지에이터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방마다 있는 책상에도 방문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이 적힌 카드와 쨈병을 이용한 소박한 장식의 꽃병, 방금 꽃은 듯한 아름다운 꽃들이 놓여 있었고, 여러 가지 쿠키가 한 접시 가득 담겨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맛있는 홈메이드 쿠키를 시간을 두고 아껴 먹었다.

방문에는 'welcome'이라는 장식글자와 함께 직접 그린 아름다운 풍경화가 걸려 있었다. 우리는 여행가방만 방에 부려 놓고는 호스트의 집에 초대받아 차를 대접 받았다. 둘째 놈이 배가 고팠는지 '밥'하고 소리치자, 호스트인 스티븐이 의미를 물어보고는 얼른 부엌으로 가서 어느새 김이 나는 현미밥을 해왔다. 쌀은 우리가 안남미라고 부르는 풀기가 없는 쌀이었다. 문제는 밥만 있지 한국식 반찬이 없어 낭패였다. 스티븐은 '아이에게는 음식이 바뀌는 게 가장 큰 충격'이라며 주경이의 이런저런 요구를 세심하게 챙겨주려고 애썼다.

호스트 부부의 따뜻한 배려에 긴 여행의 피로도 긴장도 녹아내리면서, 온 몸이 심하게 맞은 듯 아프기 시작했다. 주경이는 공항에서의 일은 깨끗이 잊은 듯 집 앞 넓은 풀밭에 세워진 그네를 타고 놀았다. 나와 윤경, 아내는 모두 침대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며 잠을 청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호스트 부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백오십여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경건한 표정으로 좌정하고 있었고, 앞에 음식이 없었다면 예배시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아름다운 찬송 몇 곡을 부르고는 튀긴 닭고기요리, 감자, 당근요리로 차려진 식사를 맛있게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식탁사이로 눈사람 분장을 한 두 아이가 나타나서 폭소가 이어지는 이벤트를 연출했고, 아이들의 합주와 합창이 식사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짧고 재미있는 글을 읽어 좌중의 웃음소리가 식탁을 가득 메웠다. 축제 분위기의 식사가 끝나고 나는 설거지를 도왔다.

지옥과 천국이 교차되는 숨가쁜 하루가 조용히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요일 미팅에 참가했다. 동요처럼 들리는 자연을 찬미하고 봄을 기다리는 찬송가 몇 곡을 아이들과 함께 부르더니, 짧은 기도와 함께 미팅을 마쳤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미팅이었다. 어른과 아이들이 다 같이 참석하는 이곳은 주일날 교회에서 하는 예배같은 것이 없었다. 일요일 예배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이었지만 목회자의 특별한 말씀선포 같은 것도 없었다.

오후에는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같은 공동체인 다벨 부루더호프로 건너갔다. 특별한 예식이 열린다고 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윤경이는 집에 남고 우리 세식구는 공동체 전용버스를 타고 영국의 집들과 풍광을 구경했다. 마치 달력을 넘기는 듯한 시골풍경이 전개되었다. 어느집 지붕도 같은 형태의 것이 아닌 나름대로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부드럽기만한 풀밭 지평선 위에 뭉실뭉실한 구름같은 털을 두른 양들과 각양각색의 예쁜 집들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조용한 시골에 자리잡은 다벨 부루더호프에 도착하니, 언덕길 위로 역시 넓은 풀밭과 지붕과 뾰족한 아름다운 고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사잇길로 멋진 구랫나룻을 기른 청바지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과, 검소한 느낌을 주는 투피스식 전통의상에다 컵투(kurfttu)라고 하는 삼각형 머리수건을 쓴 여인들이 뒤섞여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한 가족이 1년 8개월의 공동체 생활 끝에 나비스(입회회원)가 되는 서약식이 거행되는 날이었고, 더구나 그 예식의 주인공은 공동체 역사 이래 첫 한국인 가족이었다. 서약식은 미국, 호주 등지의 부루더호프 공동체 식구들이 마이크로 연결된 국제전화로 함께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삼백 여명이 넘는 다벨 공동체 전원이 한국말 가사로 찬송가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모두 이날의 예식을 위해 한국말로 찬송연습을 한 것 같았다. 새로운 한국인 멤버에 대한 애정의 표시였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들의 이 한국인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절절히 전해져왔다. 케빈 엔 지니라고 불리는 이분들은 삼십안팎의 나이에 이곳에 왔지만 한국문화를 강하게 심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길가에는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또 '봄이왔네 봄이와'하는 민요가 한국말로 들려와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다벨 공동체에는 한국에서 온 게스트들이 열명도 넘는 것 같았다. 신학생, 고등학교 선생, 전도사, 여대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부루더 호프생활을 체험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케빈 앤 지니 부부가 있었다. 처음 만남이었지만 솔직하고 따뜻한 대화가 오갔고, 나이를 넘어서서 많은 깨우침을 우리에게 주었다. 지금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선승처럼 맑은 얼굴이 선명히 뇌리에 남아 있다. 원래 그런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그 생활이 그런 얼굴을 만드는 걸까? 일요일 밤 늦게까지 서약식에 참여하고 돌아오니 몸이 더 힘들었다. 그러나 쉴 수도없었다. 감기로 인한 고열 탓인지 시차문제 때문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내일이면 공동체의 정규노동이 시작될 터인데, 몸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막노동은 신학원 졸업한 뒤에 해 보았지만. 공장 일은 해 본적도 없고, 공장 안에 들어가 본적도 없어 적응이 염려스러웠다. 나는 무슨 일이든 호스트에게 물어보면 해결된다던 다벨(Darvell)의 케빈이 한말을 상기하면서 불안을 가라 앉혔다.

우리 가족의 호스트를 자원한 스티븐 킹은 남자이면서도 곱고 섬세한 외모를 지녔고 나이는 나보다 세 살 많으니 쉰둘 정도이고, 나와 동갑인 그의 아내 루실 킹은 남편과 대조적으로 어딘지 소년같은 얼굴에 유대계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고, 부드럽고 세련된 태도와 함께 강철같은 내면의 힘이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두 분 다 철저하다 싶을 정도의 완벽한 섬김과 치밀한 성품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분들이었다

<계~속>

 

 
<광명시민신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