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화와 피케티 열풍
장영기(광명복지국가소사이어티 대표, 변호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사회 양극화가 심각하여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단연 으뜸이다. 실존이 힘들어 삶의 변방으로 내몰린 1000만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 고용인구 중 23%에 해당하는 영세자영업자들, 그리고 삶의 벼랑에 몰린 특수고용직 근로자들, 청년 실업 등 이들은 사회 양극화 저점의 터널에 갇혀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이러한 사회 양극화 정도는 OECD 국가 중 미국과 난형난제로 꼴지를 다투고 있다.
날카롭게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다룬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경제성장율 속도 보다 항상 높다. 즉 자본이 스스로 증식해 얻는 임대료, 배당, 이자, 이윤, 부동산이나 금융상품에서 얻는 소득 등 자본소득이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임금, 보너스 등 노동소득을 웃돌기 때문에 소득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진다."고 한다.
그는 "노동소득 보다 자본소득으로 부가 집중되는 메커니즘은 재능이나 노력 보다는 태생에 따라 삶과 사회가 좌우되도록 할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능력주의를 근본적으로 잠식할 것이다."라고 한다.
피케티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 해결만이 유일한 해법이며 이를 그대로 둔다면 사회 양극화는 점점 더 심화되고 확대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신자유주의가 득세 시장의 자유를 우선시하여 2008년 “월가를 점령하라”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사회 양극화가 확대되어 왔다. 우리나라도 김대중 대통령 시절 IMF 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가 이식된 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미국도 서북유럽처럼 누진부유세로 위대한 중산층 시대를 연 시기가 있었다. 즉 자본주의 황금기인 1920년대 도금시대를 지나면서 부의 집증으로 대공황이 찾아 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누진증세를 통하여 위대한 중산층의 시대를 이루었다. 미국에서는 실제 1950년대에 최고 누진소득세율이 94%인 경우도 있었다.
피케티는 사회 양극화의 해법으로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지금의 소득불평등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국제적 공조를 통해 자본에 대한 누진부유세를 도입하고 최고 소득계층에 80%의 세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실제 세계적인 불평등 국가인 우리의 현실을 볼 때 피케티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본다. 어느 우파 학자는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견인한다고 하나 이는 양극화가 심하지 않을 때일 뿐이고 지금 미국이나 한국 같이 격차가 큰 불평등은 사회 전체의 갈등비용을 유발하고 민주주의를 왜곡하며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절망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정도까지 급격한 개혁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행복을 위하여 사회복지목적세의 도입과 사회적 임금의 증대를 통한 불평등 해소정책이 불가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극화의 지속이 우리 국민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상당수도 모두의 삶의 행복을 위한 증세, 즉 자본누진세와 소득누진세율 인상을 찬성하고 있다. 다만 그 정책을 밀고 나갈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피케티가 말한 불평등의 정치적 해결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정치지형을 보면 난망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치 지형이 너무도 기득권 중심으로 보수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권 새누리당과 현 정부가 재벌, 대기업, 부유층 등의 시장세력 및 그들과 공생관계의 정책을 양산하고 있다. 즉 이들은 기득권 세력과 카르텔을 형성하고 콘크리트 지지율 45%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에 제1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꽤 오래전부터 ‘정치 자영업자들의 모임’이라는 비판이 알려 주듯이 불평등 시정 동력이 없다. 즉 위 당은 소속 의원들의 다수가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한다고 불 수 없고 호남을 기반으로 한 지역 중심의 계파 연합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을 충실히 대변해온 정당이 새누리당이지만 새민련은 비정규직, 영세자영업자, 특수고용직 근로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민의를 효과적으로 대변하지 못해 왔다. 즉 새민련은 사회와 시민들의 대표성만 부여받았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해 대의제의 본질을 실천해 오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사회는 극도로 양극화되어 갈등과 불만이 하늘을 찔러도 이를 대변해 줄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은 대한민국을 점점 양극화로 몰고 가 기득권자들의 향연을 도울 뿐이다.
정치 개혁의 제도화가 이루어지 않는다면 사회 양극화 극복은 쉽지 않다. 따라서 기득권, 지역 중심의 정당이 아니라 가치 중심의 정당으로 재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고 이러한 가치를 실현할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 소선구제 대신 중대선거구제 도입, 비례대표 대폭 확대 등 정치 토양을 바꾸어야 한다.
기득권, 지역당의 구조로는 대한민국의 개조, 혁신 운운은 구두선에 불과함을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지금까지 실증했기에 제도의 개선이 무엇보다 먼저인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미 깨어 있다. 이를 조직화할 정치세력을 이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이미 양대 정당으로는 민의를 대변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에 정치제도 개혁을 향한 민심의 파고는 안철수 현상에서 보듯이 출렁이고 있다. 영화 민란이 일어나는 시기와 같은 상황에 민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정치권의 제대로된 혁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