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설’입니다.
부서장 A모씨가 있습니다. 부서에는 소소한 물품이나 용역 계약들이 있습니다. 담당 주무관들의 업무입니다. 담당 주무관은 기안을 합니다. 계약을 추진합니다. 이 과정에서 계약의 기준을 통해 ‘공정성’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드물 것입니다. 아는 인맥이나 지인을 통해 일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서장이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부서장의 지인 인맥이 동원됩니다. 상의라는 ‘협의’를 통해 부서장의 인맥과 계약합니다. 상의 혹은 협의라는 형식적인 틀이 작동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 틀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됩니다. 지난 행정감사에서 정치인들의 업체 소개도 실상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부서장 ‘독식’에 부서 직원들, 주무관들의 불만은 잠복해있습니다. 부서 직원들이 함께 ‘회식’이라도 하면 조금은 위안(?)이 될 듯도 합니다. 독식에 ‘포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간혹 업자가 끼는 경우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나오니 끼리끼리 회식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경우, 실무자로서 크던 작던 계약을 추진하면서 ‘공정한 룰’ 혹은 ‘공정한 관행’을 만들어 보려고 했던 이들이 가지는 낭패감은 어떨까 싶습니다.
사람을 뽑는 ‘공채’가 있습니다. 공개경쟁 채용. 공정한 채용방식을 통해 능력있는 사람을 뽑는 과정입니다.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하고, 공정한 인사가 참여해서 심사숙고해서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선택은 동시에 포기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 받은 자가 있으면, 탈락하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똑같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사가 만사이고, 특별히 공정해야 합니다. 인사의 ‘룰’. 그런데 여기에도 입김이 작용합니다. 입김을 ‘후~’하고 불면, 그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서 어디쯤에 가서 ‘안착’합니다. 이미 그 입은 다물어져 있습니다. 누군지 돌아보지만 그 흔적은 가물가물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알면 다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채가 진행됩니다. 이때 공채는 ‘맞춤형’입니다. 언뜻 공정해보이지만, 누군가를 특별하게 채용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가 설치됩니다. 그것을 살피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만 압니다. 그리고 예정된 누군가가 입성합니다. 우리의 ‘공채’는 그러합니다.
학교는 또 어떠합니까. 학교에도 수많은 계약이 있습니다. 학교는 교장의 성역입니다. 행정실과 간혹 줄다리기를 하지만, 절묘한 안배가 있습니다. 떡고물입니다. 교장의 인맥이 다 동원됩니다. ‘교육적인 공간에서 어찌 이럴 수가’ 하는 마음이지만, 현실은 냉정합니다.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마나 먹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끼리 교류도 합니다. 그들만의 커뮤니티입니다. 인맥을 동원하고 소개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공정한 룰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인맥과 소개로 이뤄진 계약은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안철수’에 열광합니다. ‘스티브잡스’의 죽음에 전 세계가 애도합니다. 그들은 존경을 받는 혹은 다른 비전을 보여준 경영인이자, 리더입니다. 그들은 ‘혁신’의 상징입니다. 관행을 벗고, 일로 승부합니다. 혁신적인 방식, 제도를 도입합니다. 그들은 국민들의 세금을 앉아서 주머니 쌈짓돈 쓰듯이 쓰는 이들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생존에서 공정한 룰과 비전을 같고 승부를 했던 이들입니다. 혁신은 불공정과 반칙, 변칙을 통해 이뤄질 수 없습니다. 공정한 룰과 제도의 틀, 공정한 관행을 기본으로 하고 그 안에서 혁신과 변화를 지속해 가는 것입니다. 나름 그들을 보는 하나의 ‘코드’일 듯합니다.
공공의 영역은 공정한 룰, 약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공정성과 형평성을 띠어야 합니다. 구성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룰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승진에 눈이 멀어서, 공정성을 왜곡하고, 올바른 판단을 가로막는다면 물리쳐야 합니다.
저는 기자입니다.
기자의 눈> 공직사회는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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