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봉(광명텃밭보급소 상임대표, 피스빌리지 아시아순환농업연구원장)
우리 교회의 활동 터전이었던 달동네는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게 되었다. 그곳에는 현재 도덕파크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우리교회는 광명6동과 광명5동 시절을 거쳐 지금은 철산4동 달동네에 자리를 하고 있다. 광명6동으로 이사하고 나서 광명에서 나의 본격적 활동이 시작 되었다. 그 이전에 나는 민중교회운동의 전선에서 열심히 노동운동, 빈민운동을 지원해 왔다. 구로지역민중교회운동연합, 감리교민중교회운동협의회에서 회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총무를 지냈다.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가 전국적인 운동으로부터 지역운동으로 자리를 바꾸게 된 계기는 사회주의권의 몰락이었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구도 아래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던 국제 관계는 무너졌다. 아울러 사회주의 사상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본주의만 남은 세계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무한경쟁, 강자의 독식, 다국적 자본의 자유를 향해 끝도 없이 달릴 것이다. 자본의 탐욕 앞에 약소국과 서민들은 더 힘겨운 삶을 강요당하게 될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나는 새로운 세계관운동이 필요함을 깨닫고 동료들을 모아 새로운 모임을 조직하였다. 우선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학습을 시작하였다. 좋은 선생님들을 모시고 새롭게 태동된 신과학운동, 동양의 전통종교사상 등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많은 신과학 서적과 노자, 장자, 대학, 금강경, 성경 등을 읽어나가며 생태-생명주의의 가치를 심어 나갔다. 돌이켜 보면 6년여에 걸친 공부가 지역으로의 방향전환뿐 아니라 오늘날 도시 농부운동을 하게 된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지역에서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하게 된 것은 1998년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공정감시단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부터다. 당시 손학규의원의 도지사 출마로 공석이 된 을구 보궐 선거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광명경실련 활동을 하게 되었다. 99년부터는 시민감시단을 만들어 시정과 의정 모니터링 등 지방자치 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이후 시민단체협의회 결성, 새교육공동체시민회의 등의 창립, 참교육학부모회의 출범, 구름산 방과후 학교 창설 등에 관여하였다. 선거 때 마다 시민단체 중심으로 선거대책기구를 결성하여 꾸준히 일 하였다. 2010년 지방동시선거에서는 13개 단체가 참여한 유권자운동본부를 만들어 경기도 평균보다 6%가 많은 표를 좋은 후보들에게 얻어주었다. 교육위원과 교육감의 표는 8%가 높았다.
2002년에는 지역의 언로가 막혀 있음을 절감하고 인터넷 광명시민신문을 창간하였다.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80여명의 발기인들이 십시일반 출연하여 신문을 시작하였다. 이후 15명의 이사진, 60여명의 필진들이 함께 활동하며 광명의 정론지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동안의 지역 활동 중 기억나는 일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대략 시기별로 본다면 경륜장 반대투쟁, 반딧불이 서식지 지키기 운동, 도덕산 정자 건립 반대운동, 시민대화합운동, 광명경전철 민자사업 반대투쟁, 박달하수처리장 지하화 요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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